이영훈 서울대 교수
“日帝, 영구병합 목적 조선 근대화에 주력” [한국일보 2004.04.22]
일제 식민지 시대는 우리 역사의 암흑기로 여겨져 왔다. 일제의 일방적 수탈 아래 식민지 조선의 민중은 궁핍과 질곡에 신음했다는 것이 전통적 역사 인식이었다. 그러나 최근 학계 일각에서 이런 인식은 식민지 조선의 실상과 거리가 멀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경제적으로 커다란 발전이 이뤄졌고, 당시 이식된 근대적 자본주의의 토양이 1960년대 이후 비약적 경제성장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런 주장에 앞장서 있는 사단법인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영훈(李榮勳ㆍ53ㆍ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소장을 만나 보았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이미지를 수정하게 된 개인적 동기는.
“1990년에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공동연구에 착수했다. 전국을 돌며 토지대장 등 원자료를 수집했다. 경남 김해 지역에는 대량의 원자료가 남아 있었다. 자료를 보고 교과서와는 너무 다른 내용에 깜짝 놀랐다.토지 신고를 하게 해서 무지한 농민들의 미신고지를 마구 빼앗았다는 교과서의 기술과 달리 미신고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면밀한 행정지도를 했고, 토지사기를 방지하기 위한 계도ㆍ계몽을 반복했다. 농민들도 자신의 토지가 측량되고, 지적(地籍)에 오르는 걸 보고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 결과 분묘, 잡종지를 중심으로 0.05% 정도가미신고지로 남았다. 그때 우리가 갖고 있던 식민지 조선의 이미지는 가공의 창작물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은 무엇인가.
“일제의 식민통치사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선의 영구 병합이 식민지통치의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탈ㆍ약탈이 아니라 일본 본토와 동일한 제도와 사회 기반을 갖춘 나라로 만들어 영구 편입하려는 야심찬 지배계획을 갖고 있었다. 근대적 토지ㆍ재산 제도 등은 이를 위한 과정이었다.”
-----일제 식민지 통치를 미화한다는 오해를 살 만한데….
“일제가 조선을 영구 병합하고자 한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계획이었다. 일본 내부에서도독자적 역사를 가진 문명 민족을 동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엄청난 비용을 치를 것이니 건전한 협조 기조 위에서 대한제국이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대처했으면 식민지화를 피할 기회도 있었다. 영구 병합을 위한조선의 근대화는 민족의식의 고양과 저항을 부른다는 기본적 모순을 안고있었다.”
-----일제 식민지화 이전 조선의 경제 상황은.
“1910년 이후는 근대적 통계 자료가 있으나 그 이전은 직접적 자료가 없다. 그러나 마지기 당 소작료 자료, 쌀값 상승을 보여주는 간접적 자료 등을 통해 대체적 윤곽을 그릴 수는 있다. 큰 추세로는 18세기를 거치며 1인당 소득이 서서히 떨어지다가19세기 후반 급격히 감소했다. 1750년을 정점으로 농촌의 장시(場市) 숫자, 인구, 쌀 생산성 등이 일제히 떨어졌고,쌀값이 오르고 실질임금이 하락하는 등 경제침체의 강한 추세를 발견할 수있었다.”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의 경제적 변화는.
“침체 일로의 조선 경제가 1900년을 전후해 상승 곡선을 그린다. 일본으로부터의 자본 유입, 근대적 시장제도의 정착, 소유권 제도의 정비, 근대적 기업제도와 상법, 거래 안전성을 보장하는 신탁, 통신, 운수의 발달 등이 뚜렷하다. 식민지 시대를 걸쳐 총 80억 달러의 자본이 유입됐고, 일본인들의 농장과 공장이 생기면서 한반도 지역 단위의 GDP가 상승하고 1인당GDP와 생활물자 소비량 등이 크게 늘었다. 1920ㆍ30년대 GDP는 연 평균 4% 정도 상승했다.”
-----식민지 민중의 생활수준이 높아졌나.
“그렇다. 무엇보다 인구가 늘었다. 19세기 내내 인구가 감소하다가 20세기 들어 증가세로 돌아섰다. 인구는 위생이나 전염병 등과도 관련이 있어직접적 경제 자료는 아니나 당시의 경제상황을 추정하게 하는 자료다. 식민지 시대 한반도 인구는 그 이전의 1,700만명에서 3,000만명(해외 이주300만명 제외)으로 늘어났다. 그만큼 경제력이 성장한 것이다.”
-----당시 세계 경제에서 연 평균 4% 성장의 의미는.
“1920년대는 세계경제의 침체기였다. 당시 아무리 호경기라도 연 2% 성장을 넘긴 나라는 거의 없었지만 일본 자본주의는 연 3% 이상의 지속적 성장을 계속했다. 식민지 조선의 경제 발전은 한반도와 만주, 대만을 포함한일본경제권에 공통된 성장의 결과였다.”
-----일본 자본주의에 특별한 성장 요인이 있었나.
“활발한 자본 수출이다. 일본은 자국 통화와 1대1로 교환할 수 있는 식민지 통화권, 즉 엔화를 공용화로 하는 엔통화권을 창출했기 때문에 달러나금 지불 부담을 지지 않고 대량의 자본을 대만과 조선, 만주에 투입할 수있었다. 대량 투자와 지역 개발로 조선의 메리야스나 신발 등 공업제품이만주에 수출되는 등 일본 경제권 내의 시장ㆍ분업 관계가 심화해 활발한상품ㆍ자본 이동을 불렀다.”
-----영국 등도 식민지를 갖고 있지 않았나.
“영국 등은 식민지에 공장이나 자본재, 중간재를 수출해 산업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서구 제국주의는 기본적으로 원료 수탈형이었다. 일본과 달리영구 병합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인도라는 주식회사를 영국이 투자해서 경영하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상업적 투자를 했다. 그것이 제국주의 원래의 모습이다.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는 그런 틀로 이해하기 어렵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인종적으로 비슷하고, 문화적으로 상당히 유사해 하나의 커다란 일본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일제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행운이었나.
“1941~45년 북한 지역에는 엄청난 중화학 공업이 건설됐고 그 직접적 수혜자는 북한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상당 부분이 파괴됐지만 처음 만들 때가 어렵지 복구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북한은 시장경제 제도를 청산한 결과 기아의 늪에 빠졌다. 반면 일제가 구축한 자본주의적 시장질서를보존하고 발전시킨 한국 경제는 크게 성장했다.따라서 일제가 남긴 물적 유산이 50년대 이후 얼마나 도움이 됐는가는 의문이다. 다만 식민지 당시 정착된 시장 경제 시스템을 해방 이후 한국이때려 부수지 않고 미국의 주도 아래 다시 건설된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선택이 빛난다.”
-----일제 식민지 통치가 자주적 자본주의 발전 가능성을 오히려 왜곡했다는게 통설 아닌가.
“우리는 18ㆍ19세기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추계에 따르면 1910년 식민지 조선의 1인당 국민소득은 40달러(1937년 가격으로는약 60달러) 수준이었다. 산업시설도 없었고 대단히 빈곤한 상황이었다. 자본축적률이 낮고, 인구의 80~90%는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사회였으나 18세기 이래 장기 침체를 겪고 있었다. 일종의 도덕적 가치나 명분론이 지배하는 사회였고, 근로규율이나 근로의욕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경제가장기적으로 침체하면서 스스로 해체될 심각한 위기 상황이 이어졌다.”
-----해체 위기란 민란 등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하나의 현상이다. 사회가 자기 통합력을 상실할 때, 민중이 지배계급의 도덕성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을 때 폭동이 일어난다. 19세기 들어1840년 경부터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약 50년 간 농민들이 집단적 반란에 나선다. 조선왕조 지배계급, 즉 왕족이나 관료가 더 이상 건전한 통합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됐고, 사회를 건전한 방향으로 끌고 나갈 선진적이데올로기를 결여했다.닫힌 사회 공통의 폐색점에 이른 상황이었다. 사실 식민지 초기에 우리지식인들은 19세기를 되돌아보며 참 역사가 부끄럽다는 얘기를 많이 했으나 해방 이후 그런 인식을 모두 정체론이라고 몰아 붙이며 역사를 밝고 진취적으로 기술해 왔다. 그러나 역사의 참 모습을 외면하고서는 역사에서교훈을 얻을 수 없다.”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
I. 문제제기
1910∼1945년간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한 기간에 관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서술을 한마디로 축약하라면 대개의 한국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수탈’이란 단어를 생각해 낼 것이다. 지난 50년간 한국의 국사 교과서가 국민을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2001년 발행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일제는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철저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억압, 수탈하였다”라고 쓰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 2001: 129). 이 글에서 나는 이 같은 국사 교과서의 식민지기 서술이 현재의 연구수준에서 볼 때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이해에 기초한 경우가 많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주요 검토 대상은 일제의 토지와 식량의 수탈, 그리고 일본군위안부의 강제동원 문제로 국한된다. 아마도 이 세 가지는 한국 사람들에게 일제의 수탈이라 하면 가장 대중적으로 연상되어 온 분야일 것이다. 토지와 식량의 수탈 문제는 나의 전공인 경제사에 속하여 나로서는 쓰기에 부담이 별로 없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나로서는 직접 연구에 종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그에 관한 한국 사람들의 관심이 워낙 높기 때문에 약간의 만용을 부려서라도 지금까지의 전문적 연구를 참고하면서 교과서의 관련 서술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검토한 자료는 1946년부터 2002년까지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로서 도합 59종이다.
내가 혹 한국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을지 모를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잘못된 역사교육은 사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을 위험성이 크다는 우려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가 집권당이 추구하고 있는 ‘친일진상규명’ 또는 ‘과거청산’을 둘러싸고 심각한 내홍(內訌)을 겪고 있는 것도 혹 그 때문일지 모른다. 이웃 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하고 통치한 일제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일본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반성은 한·일 간의 협조적 미래를 건설함에 빠질 수 없는 조건이다. 그렇지만 일제의 지배 내용을 오해하거나 심지어 왜곡까지 할 경우 그것은 아무래도 한·일 간의 우호적인 연대를 맺고 이어감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의 문제의식은 역사쓰기 내지 역사교육과 관련된 역사가와 국민국가의 역할이라는 문제로까지 확장되어 있다. 국민국가가 그의 국민을 교육하고 또 동원하기 위해 쓰는 국사는 과거에 대한 국민의 집단기억에 토대를 두고 있는 듯이 보인다. 집단기억은 그것의 유구해 보임이나 집단 그 자체가 발하는 권위로 인해 역사가들의 역사쓰기를 제약한다. 그런데 유구한 집단기억이라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생겨난 경우가 많다. 그것도 몇몇 역사가들의 개인적이거나 임의적인 역사쓰기가 우리의 이성적 추론으로는 다 설명하기 힘든 어떤 미묘한 계기와 복잡한 경로를 통해 국민의 집단기억으로 승화한 형태가 많다. 그렇게 과학적 근거를 가지지 않은 채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단기억이 민족과 전통의 권위를 빌려 국사란 이름으로 국민을 동원하는 마성(魔性)과 같은 힘을 ‘신화성’이라고 정의하자. 이 글의 제목에 나오는 그 말의 뜻은 이와 같다.
Ⅱ. 토지의 수탈
1910년 8월 한반도를 식민지로 장악한 일제는 이후 8년간 ‘토지조사사업’(이하 ‘사업’으로 약칭)을 실시하여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제도적 기초를 정비한다. 국사 교과서는 일제가 이 ‘사업’을 통해 대량의 토지를, 구체적으로는 전국 농토의 40%를, 사기와 폭력으로 수탈하였다고 가르쳐 왔다. 그런데 해방 후의 국사 교과서가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점에 예의(銳意)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사 교과서가 ‘사업’에 관해 최초로 쓰기 시작한 것은 살펴 본 한에서 1956년 이병도에 의해 집필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이다. 해당 서술의 취지를 내 나름으로 요약하고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李丙燾 1956: 185-186).
① 구래의 토지제도는 국유제의 명목 하에 사유권이 성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양반은 수조권(收租權)을, 농민은 경작권을 가지고 있었다.
② 이러한 상태에서 일제는 신고의 방식으로 소유권을 조사하였다.
③ 주로 소유권을 신고한 자는 수조권자인 양반으로서 그들은 대토지소유자가 되었다.
④ 그 결과 농민들은 경작권을 상실하고 소작농이 되었다.
⑤ 한편 궁원(宮院)과 관청의 토지는 정책적으로 국유지가 되었다.
⑥ 소유권이 애매한 부락의 공유지도 신고가 이루어지지 않아 국유지로 되었다.
⑦ 국유지로 된 토지는 동척(東拓)이나 일본인 농장의 토지로 집중되었다.
‘사업’에 관한 이병도의 이 같은 서술은 1933년에 나온 박문규의 논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朴文圭 1933). ‘사업’에 관한 학술연구로서는 최초라 할 수 있는 박문규의 논문은 이후 1970년대까지 그 학술적 중요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 내용을 잠시 소개하면, ‘사업’ 이전 조선의 토지제도는 국유제로서 양반은 수조권을, 농민은 경작권을 보유하였다. 일제가 소유권을 신고하게 하자 수조권자로서 세력 있는 양반이 소유권을 인정받고, 신고할 능력이 없는 농민들은 경작권을 상실하여 무권리의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로 이 점이 ‘농촌사회의 근대적 분화의 기점’으로서 ‘사업’이 지닌 역사적 의의라는 것이 박문규 논문의 핵심이다. 박문규의 논문에서 일제가 국유지로 수탈한 토지는 전체의 1/40 정도로서 그렇게 차지해도 좋을 만한 구래의 궁원과 관청의 토지에 제한되어 있다. 박문규의 논문에서 일제는 토지의 수탈에 그리 관심을 둔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논문에서 일제는 토지의 사유제(私有制)를 창출함으로써 구래의 조선사회를 자신의 영토로 영구히 편입시키기에 적합한 구조로 강력히 재편하고자 했던 외래권력일 뿐이었다.
이상과 같은 박문규의 논문을 이병도는 그의 국사 교과서에서 충실히 요약하고 있다. 그 역시 일제의 토지 수탈을 강조할 의도로 교과서를 쓰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의도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앞서 소개한 대로 부락의 공유지에 관해 이병도는 그것이 국유지로 수탈되었다고 하였는데, 박문규의 논문에서 그것은 부락의 세력 있는 지주들이 차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이병도는 국유지로 된 토지가 동척이나 일본인 농장으로 집중되었다고 했는데, 이런 지적도 박문규의 논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 ‘사업’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에서 밝혀진 바이지만, 일제가 부락의 공유지를 국유지로 수탈하거나 국유지를 일본인 회사에 불하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金鴻植 외 1997: 23-24, 528-530). 그럼에도 그 같은 오해가 지금까지 국사 교과서에서 되풀이 되어 온 것은 이병도가 그 단초를 제공하였던 셈이다. 그 점에 관한 한, 이병도 역시 해방 후 10여 년간 서서히 형성되어 온 일제가 토지를 수탈하였다는 신화에 이미 일부 포섭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1933년 박문규의 논문에서 일제의 토지 수탈에 관한 지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오늘날의 국사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이 걸출했던 맑스주의 경제학자의 관찰력이 부족해서 그러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식민지기에 작성된 일제에 대한 가장 과격한 비판의 하나로서 신채호(申采浩)의 「조선혁명선언」을 들 수 있다. ‘사업’ 직후인 1923년에 쓰인 이 선언은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 천택(川澤), 철도, 광산, 어장 ……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라고 일제의 수탈상에 대한 격렬한 비판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기묘하게도 토지=농지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신채호처럼 ‘사업’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도한 당대인들에게 일제가 농지를 수탈했다는 의식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병도 역시 그 시기를 유년기로 보낸 사람이었다. 1926년 이상화(李相和) 시인이 “지금의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노래하였지만, 그것은 삼천리 강산 전체를 빼앗긴 시인의 슬픔이었지, 결코 문자 그대로 ‘들’만을 가리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해방과 더불어 일제가 토지를 수탈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또는 글에서 심심찮게 언급되기 시작하였다(金鴻植 외 1997: 22∼26). 그 산발적인 이야기가 권위 있는 학술 논문으로 집성된 것은 1955년 이재무에 의해서였다. 남로당원 출신의 이 젊은 혁명가는 일본 도쿄대학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사업’에 관한 국사쓰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한 논문을 작성하였다. 거기서 그는 선배 박문규가 ‘사업’의 수탈성을 고발하지 않은 것은 일제의 탄압 때문이라고 한 다음, 일제가 ‘사업’에서 소유권 조사방식으로 채택한 신고가 실은 거대한 음모와 사기였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소유권 관념이 희박하고 까다로운 행정절차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농민들이 신고기한을 놓쳤다. 그 광대한 토지는 총독부의 국유지로 몰수되거나 그것을 대리 신고한 악덕 지주의 차지가 되었다(李在茂 1955).” 이재무가 이 파천황(破天荒)의 새로운 주장을 펼칠 때 그에 합당한 사료나 사례를 하나라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업’에 관한 일제의 공식 보고서에서 소유권이 신고된 대로 사정(査定)된 비중이 전 필지의 99.5%나 됨을 두고 대리 신고가 얼마나 성행하였으면 그 같이 높은 수치가 나왔겠는가라는 식으로, 말하자면 공식 보고서의 행간(行間)을 자의적으로 뒤집는 방식으로, 자신의 추론을 뒷받침하였을 뿐이다.
이 실증적 근거가 허소하기 짝이 없는 논문이 이후 한국 역사학자들의 국사쓰기에 미친 커다란 영향은 그 무엇으로 설명되기 힘든 복잡하고 미묘한 면이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구종주국이었던 일본의 최고학부인 도쿄대학이 그 학술적 가치를 인정하였다는 점도 그 복잡 미묘함의 한 가닥을 이루었을 터이다. 국사 교과서에 대한 이재무의 영향력이 명확히 관찰되는 것은 1962년 역사교육연구회에 의한 중등국사 교과서에서이다. 동 교과서의 ‘사업’에 관한 기술은 다음과 같다(역사교육연구회 1962: 150).
일본은 한국에 손을 뻗치면서 가장 먼저 계획한 것이 토지를 일본인이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이조 시대 말기만 하여도 토지는 원래 나라에 속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일부의 상층 계급을 제외하고는 토지를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본은 이것을 이용하여 일정한 기한을 주고 자기의 토지를 신고하지 않으면 국가의 땅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지금까지 토지를 사유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농민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토지를 빼앗기었고 또한 이조 시대의 관청 소유의 토지도 국유지라고 하여 빼앗기게 되니 일제에 아부하는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토지가 일본 총독의 지배 하에 들어가고 융희 2년에 설치된 동양척식회사가 이것을 맡아서 운영하면서부터는 한국의 농민은 대부분이 소작인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1914년의 통계를 보아도 한국인은 총 경작면적의 반 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많은 농작물이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사업’의 목적이 아예 토지의 수탈로 설정된 가운데 신고 방식을 통해 우매한 농민을 속이고 뺏는 사기와 약탈이 총 경지의 절반에 달할 정도로 광범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실제 식민지기에 걸쳐 일본인들이 취득한 경지는 전체의 10% 전후였다(朝鮮銀行調査部 1948: 1-29). 그것도 노일전쟁 이후 1920년대까지 하구(河口)나 연안(沿岸)에 분포한 저습미간지의 매집과 개간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 교과서는 실제 있지도 않은 어떤 통계에 근거하여 ‘사업’이 진행 중인 1914년에 이미 경지의 절반을 일본인이 차지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사업’에 관한 신화성의 국사쓰기는 1967년 민영규와 정형우에 의해 약간의 덧붙임과 수정을 본다. 이 두 역사가는 신고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는 “내 나라 내 땅인데 그 소유권을 일본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할 까닭이 무엇이냐?”고 하면서 신고를 거부한 민족주의자들이 있었음을 새롭게 추가하였다. 아울러 ‘사업’을 통해 총독부가 수탈한 토지가 “전국 국토의 40%”였다고 함으로써 앞의 역사교육연구회에서 ‘반’이라고 한 것을 약간 깎아 내렸다(閔泳珪·鄭亨愚 1967: 229). 무슨 근거가 있어서였던 것은 아니고 그렇게 절반은 아니 되었다고 해 두는 편이 더 적절하리라는 느낌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렇게 하여 이후 2001년까지 이어지는 40% 수탈설의 신화가 탄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3년까지 ‘사업’에 관한 국사 교과서의 서술은 크게 문란하지 않았다. 여러 경로를 통해 새로운 신화가 출현하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병도의 교과서가 교과서시장에서 큰 비중을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교과서인 1973년도판을 보면 아무래도 17년 전에 비해 서술이 어지럽다. 그 역시 점차 강화되는 수탈의 신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는 ‘사업’의 목적이 약탈이라고 명기하고 있으며, 민영규 등이 만든 신화를 채택하여 ‘민족적인 감정으로’ 신고하지 않은 토지가 많았다고 적고 있다(이병도: 232). 그렇지만 이미 널리 유포된 신고 음모설과 40% 수탈설에 대해 이병도는 함구하고 있다. 그는 17년 전과 마찬가지로 수탈의 주요 대상을 관청과 부락의 공유지로 한정하고 있으며, 그러했던 한 서술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사업’의 수탈 정도에 대해 끝까지 신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흔히들 식민지기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복무했던 이병도의 이력을 들어 그의 역사학을 폄하하고 있지만, 나는 그의 교과서에서 그의 실증사가로서의 의외로 완고했던 자세를 발견하고 새롭게 느낀다.
잘 알려진 대로 1974년부터 교과서 편찬제도는 종래의 검인정(檢認定)에서 국정(國定)으로 바뀌었다. 그 같은 제도 변화는 종래 여러 교과서에서 산발적으로 생성되어 온 ‘사업’에 관한 신화를 단일의 교과서로 수렴하고 정형화하였다. 1974년 문교부가 편찬한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사업’은 다음과 같은 줄거리로 서술되고 있다(문교부 1974: 204).
① ‘사업’이 소유권 조사를 위해 채택한 기한부 신고는 농민의 농토를 빼앗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② ‘사업’의 결과 전국 토지의 40%가 총독부의 소유로 되었다.
③ 이들 토지는 일본인 회사나 이민에 헐값으로 불하되었다.
④ ‘사업’으로 종래 수조권자인 양반은 대지주가 된 반면, 농민들은 경작권을 상실하고 기한부 계약의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⑤ 권리를 상실한 궁핍 농민은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후 2001년까지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사업’ 관련 서술은, 정기적으로 개정될 때마다 약간씩 달라졌지만, 이 기본 줄거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면, 반드시 일률적인 것은 아니지만, ④가 삭제되거나 부락의 공유지가 국유지로 수탈되었다는 원래 이병도의 이야기가 추가되거나 하였다는 점이다. 전술한 대로 ④는 박문규에 기원을 둔 것으로서 이재무에 기원을 둔 ①-③과는 수준이 다른 이야기이다. 이런 정도의 流動的인 변화를 동반하면서 1974년 이래 약 30년간 국사 교과서는 신고 음모설과 40% 수탈설로 상징되는 ‘사업’에 관한 신화를 그의 국민에게 널리 전파하였다.
해방 후의 한국 역사학계가 ‘사업’에 관한 학술연구에 착수하는 것은 매우 뒤늦은 1982년부터이다. 동년에 나온 신용하의 ‘사업’에 관한 저서는 ‘사업’의 수탈성을 본격적인 학술로서 뒷받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신용하가 강조한 ‘사업’의 수탈성은 이미 교과서를 통해 널리 퍼져있는 신화와 다소 거리가 있었다. 신용하는 ‘사업’ 이전의 조선시대에 사실상 토지사유제가 널리 성립했다고 보아 신고 방식의 폐해에 대해선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신고 음모설은 ‘사업’ 이전의 조선사회를 토지의 사유를 알지 못한 낮은 문명으로 설정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려는 그 본의와는 무관하게 우리나라의 역사적 문명 수준을 비하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 대신 신용하는 ‘사업’ 과정에서 벌어진 국유지 분쟁의 수탈성을 강조하였다. “일제는 국유지가 실은 자신의 소유임을 주장하는 조선 농민의 분쟁을 죄다 무력으로 억압하였다.” 이를 인상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신용하는 일제가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 들고” ‘사업’을 강행하였다는 유명한 말을 만들어 냈다(愼鏞廈 1992: 105). 그렇지만 신용하가 이 말을 뒷받침할 사료나 사례를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신용하 역시 이전의 이재무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업’에 관한 공식 보고서를 뒤집어 읽은 방식으로 그러한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金鴻植 외 1997: 27-30). 그렇게 신용하의 피스톨설 역시 하나의 신화에 다름 아니었다.
‘사업’에 관한 학술 연구에 일대 전기가 마련되는 것은 1984년 경상도 김해에서 ‘사업’에 관한 1차 자료들이 대량으로 발견되고 1986년부터 그 자료를 이용한 배영순과 조석곤의 실증 연구가 제출되면서부터이다(裵英淳 1987; 趙錫坤 1986, 1995, 2003). 뒤이어 1991년에는 일본인 미야지마 히로시가 ‘사업’에 관한 새로운 저작을 출간하였다(宮嶋博史 1991). 나도 이 흐름에 동참하여 1993년 ‘사업’의 수탈성에 관한 그 때까지의 통설적 근거들을 꼼꼼히 검토하고 비판하는 논문을 작성하였다(李榮薰 1993). 이 새로운 연구들은 그 세부 내용에 있어서 모두 다 같지 않지만 오랫동안 한국인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업’의 수탈성을 공통으로 부정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①19세기까지의 조선사회에서 농민의 토지에 대한 ‘사실상의 사유권’은 높은 수준으로 발달해 있었고, ②이에 양반을 수조권자로, 농민을 경작권자로 대치시키는 박문규의 고전 학설은 15-16세기에서나 타당한 것이며, ③다만 19세기 말까지 조선에서 결여된 것은 농민의 사유적 권리에 대한 국가적 증명제도와 공정한 조세제도였으며, ④이에 일제가 시행한 ‘사업’은 그 두 가지 면에 한하여 근대적 제도를 창출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으며, ⑤그 과정에서 총독부나 일부 특권층의 토지 수탈이 자행될 여지는 없었으며, ⑥국유지를 둘러싼 분쟁에는 민유지로 판정되어 조선 농민에게 지급된 토지가 많으며, ⑦끝까지 남거나 새로 조사된 얼마 되지 않은 국유지는 1924년까지 일본인 회사나 이민이 아니라 조선인 연고 농민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불하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업’에 관한 새로운 연구는 ‘사업’에 관한 기존의 모든 학술과 국사쓰기를 거의 남김없이 부정하고 있다. 이처럼 과격하게 단절적으로 기존의 연구사가 부정되는 드라마를 다른 분야의 역사학에서 찾기란 쉽지 않을 터이다.
이처럼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고 있었지만 국사 교과서의 신화체계는 지금까지 허물어지지 않고 있다. 그간에 두세 차례 국사 교과서의 개정이 있었지만 ‘사업’에 관한 서술에 달라진 내용은 없었다. 원래 신화란 그가 조작하거나 동원한 대중으로부터의 지지에 거꾸로 자신이 구속되는 소외(疏外)를 특질로 하기 때문에 진실로부터의 도전을 맞을 때엔 완강히 저항하기 마련이다. 드디어 약간의 변화가 나타난 것은 2002년부터이다. 이 해부터 중학교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모두에서 40%라는 숫자가 사라졌다. 신화의 골격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 중요한 축 하나가 빠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기뻐한다. 신화와 진실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은 결국 진실이리라. 인간이성에 대한 그러한 신뢰가 없다면 역사가는 무슨 근거로 사료와 사례를 찾아 헤매는 고된 순례를 이어가겠는가.
Ⅲ. 식량의 약탈
먼저 이 주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랄까, 나의 개인적 체험을 소개한다. 7년 전인가 나는 내가 속한 학부의 교수세미나에서 식민지기의 경제변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때 어느 동료 교수가 내가 일본으로 쌀이 ‘수출’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더니 ‘공출’되었다고 해야 옳지 않느냐고 물었다. 확인한 결과 그는 총독부가 농민들에게 조세를 쌀로 거두어 일본으로 가져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필자는 식민지기에 조세는 쌀이 아니라 화폐로 징수되었으며, 일본으로 쌀이 건너 간 것은 두 지역 간에 성립한 시장의 작용으로 쌀이 수출된 결과이며, 공출(供出)이란 것은 일제가 태평양전쟁기에 전시경제(戰時經濟)를 꾸려가기 위해 지주와 농민들로부터 일정량을 식량으로 남기고 나머지를 법정가격으로 강제 매수한 통제정책을 가리킨다고 설명하였다. 그렇지만 그 교수는 끝내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비슷한 사건이 다시 있었다. 이번에는 공개적인 학술회의 자리였다. 나의 같은 주장에 전주의 모 대학에서 근무하는 어느 교수는 자기의 고향 군산에 일제 때 일본으로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해 지은 창고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훈계조로 나무랐다. 나는 너무나 확신에 찬 그 교수의 주장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창고는 실은 수출에 필요한 저장과 검사 시설이었다. 지난 2000년 드디어 나는 이 반복되는 괴이한 체험의 원인을 캐고자 나의 강의를 듣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59명의 대학생에게 설문지를 돌렸다. “식민지기 일본으로 건너간 쌀은 다음의 어느 경로를 통하였는가? ①조세 ②공출 ③수출.” 대부분의 학생은 ②아니면 ①을 지목했다. 유감스럽게도 正答 ③을 맞힌 학생은 3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니까 고등학교까지의 국사교육이 문제의 소재였다. 그리고 그 학생들은 이후 교수라는 전문직에 종사하기까지도 굳건하게 그가 받은 신화 교육의 충직한 신도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국사 교과서의 검토로 넘어 가자. 2001년 발행의 국사 교과서가 ‘식량의 수탈’이란 제목으로 쓰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국사편찬위원회 2001: 139-140).
일제는 공업화 추진에 따라 부족한 식량을 우리 나라에서 착취하려는, 이른바 산미증식계획을 세워, 이를 우리 농촌에 강요하였다. 1920년부터 15년 계획으로 추진된 산미증식계획은 920만 석 증산이라는 무리한 목표를 설정하였기 때문에 증산량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중략> 그러나 미곡 수탈만은 목표한 대로 수행함으로써 우리 나라 농촌 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게 하였다. 증산량보다 훨씬 초과한 양의 미곡을 수탈당함으로써 우리 농민은 식량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기아 선상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에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생산되는 값싼 잡곡으로 충당하려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 서술에 이어 ‘미곡 생산량과 일제의 수탈량’이란 제목의 표를 통해 연도별 수탈량을 구체적 수치로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1927∼1931년간 총생산량의 42%인 660만 석이 일본으로 수탈되었다.
이 교과서 서술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착취’ 내지 ‘수탈’의 메커니즘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아 실제의 사실과 다른 방향으로 학생들을 오도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수탈의 사전적 의미는 ‘강제로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금성사판 국어대사전). 어떤 강포한 外來 권력이 쌀과 같이 생존에 필수적인 재화를 수탈했다고 하면, 대부분의 학생은 총독부가 총칼로 쌀을 거두어 간 것으로 해석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분석적인 학생이라면 “이미 ‘사업’을 통해 농지의 40%가 일본인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니 쌀의 40%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굳이 ‘수탈’이라고까지 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나는 필경 제기되기 마련인 이 질문에 국사 교실의 선생님들이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나는 쌀이 일본에 넘어 간 것은 쌀을 확보한 지주와 농민들이 그것을 일본으로 수출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좀더 영민한 학생은 “수출을 수탈이라 한 것을 보니 가격을 낮게 통제한 모양인데, 실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나는 “그런 가격통제는 전시기(戰時期) 이전에는 없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그 학생은 “그렇다면 수출을 왜 수탈이라고 합니까?”라고 되물을 것이다. 아마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역사학자나 경제학자는 어디에서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국사 교과서가 처음부터 그렇게 애매하게 가르친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해 최초로 자세하게 쓰고 있는 1956년도 이병도의 교과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李丙燾 1956: 186).
그들의 경제 정책은 조선이라는 식민지로부터 다량의 식량과 원료를 헐값으로 걷어가고 그 대신 공업품을 비싼 값으로 파는 것이었다. <중략> 이 정책은 또한 전 생산 분야에 있어서의 생산증가율이 그렇게 올라가지 못한 데도 불구하고 일본에 수출하는 양은 급격히 증가한다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일본의 약탈은 날로 심하게 되어 갔던 것이다.
여기서는 쌀이 일본으로 넘어간 경로가 ‘수출’이었음이 명확히 지적되고 있다. “헐값으로 걷어가고”라는 부분에서 쌀값을 통제한 듯한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으나 원래 식민지의 쌀값이 일본의 비해 3할 정도 낮았음을 그렇게 표현했다고 보인다. ‘약탈’이란 극단적인 수사가 동원되고 있는데, 전후 문맥에서 쌀 자체를 빼앗았다는 뜻이 아니라 생산의 증가분 이상을 수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 민족의 생존을 부정하였다는 뜻으로, 다시 말해 제국주의의 쌀 수출 그 자체에 깃든 반민족적 수탈성을 비판한 취지로 해석된다. 나는 이병도의 이 같은 교과서 서술에서 사실이 호도되거나 왜곡되고 있음을 논리적으로 지적하기 어렵다.
동시기 조좌호가 쓴 교과서에서의 해당 서술은 다음과 같다(曺佐鎬 1960: 226).
일본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발전하여 국내에 큰 식량문제를 일으키게 되자 한층 더 조선의 쌀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1920년부터 조선의 산미 증식 15년 계획을 세워 920만 석의 산미를 증산시키려 하였다. 이것은 계획대로는 실현되지 않았으나 이에 의하여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식량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조선의 산미는 계획대로 증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일 수출은 격증한 점이니 이는 증산된 분량보다 훨씬 더 많은 쌀이 일본에 수출된 것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한국 내의 쌀 소비량이 감소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즉 한국인은 자기가 생산한 쌀은 먹지 못하고 만주에서 수입한 잡곡으로 배를 채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국의 경제는 쌀 중심으로 개편되어 완전히 일본 경제에 종속하는 식민지 경제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도 일본으로 쌀이 유출된 경로가 ‘수출’이었음이 명확히 지적되어 있을 뿐 아니라, 쌀 수출의 배경 및 그로 인한 식민지 경제의 구조적 개편이 분석적 개념으로 훌륭히 서술되고 있다. 나는 이 조좌호의 교과서만큼 사실의 소개와 해석에서 논리적이면서 감정이 적절히 통제된 글을 이후의 국사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다.
‘사업’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식량의 수탈에 관한 교과서의 서술도 점점 그 질적 수준이 낮아지면서 애매해지거나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경향은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꽤나 일관된 추세로 확인되고 있다. 중학교 교과서에서의 예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73년까지 검인정 제도 하에서는 이병도나 조좌호와 마찬가지로 대개의 교과서가 일본으로의 쌀 유출이 수출의 경로였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74년 국정제도로 바뀐 뒤부터였다. 이후 수출이란 단어는 교과서에서 사라졌으며, 다시 쓰이지 않았다. 1979년까지는 수출을 대신하여 ‘반출’이란 애매한 말이 쓰였다. 그 이후 1980년대에 걸쳐서는 ‘가져갔다’라는 한층 애매한 말이 사용되었다. 그 다음부터 2001년까지는 앞서 인용, 소개한 대로 쌀의 유출 여부조차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착취’, ‘수탈’ 또는 ‘약탈’ 등의 거친 표현들이 횡행하였다. 그러다가 2002년부터는 ‘가져갔다’라는 1980년대의 용어가 다시 쓰이고 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수출’이란 두 글자에 그리 집착하느냐고 의아해 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역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로서 우리가 어느 시대의 역사에 접근할 때 우선적으로 주목할 대상이 당해 시대의 법과 제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예컨대 조선시대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읽고 이해할 책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이다. 다른 무엇도 이 법전을 우선할 수는 없다. 물론 법과 제도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법과 제도를 제쳐놓고서 특정 시대를 살은 인간들의 행동원리와 상호관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한심한 주장도 없을 터이다. 그 점은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한 짧다면 짧은 35년간의 역사를 검토할 때도 어김없이 타당하다.
경제사 연구자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한국경제와 관련하여 식민지기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찾자면, 바로 그 시대에 오늘날의 한국경제가 기반하고 있는 시장경제의 제도가 확립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경제의 확립에 필수적인 사유재산제도가 1910년대에 걸쳐 성립하였다. 시장경제의 주체가 되는 기업과 회사 제도가 식민지기에 걸쳐 몇 차례의 상법 개정을 통해 선진화되었다. 거래의 안정성을 높이고 거래의 비용을 줄이기 위한 금융·신탁·보험 등 각종 형태의 시장기구가 식민지기에 발달하였다. 첨단형태의 자본시장과 상품거래소도 식민지기에 문을 열었다. 일본으로 수출된 쌀은 가격변동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선물시장에서 7∼8차의 청산거래(淸算去來)를 통함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시장경제의 인프라를 해방 후의 대한민국은 약간의 개량을 가하면서 대체로 계승하였다. 식민지기에 걸쳐 그 제도에 적응하고 훈련을 받음으로써 형성된 한국인들의 인적자본(human capital)이야말로 해방 후 대한민국이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끌 때 최대의 공신으로 활약하였다. 비록 일제가 한반도를 자신의 영토로 영구병합하기 위한 기초공사의 일환으로 건설한 시장제도였지만, 역사의 신은 그것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밑거름으로 활용되도록 한 불가측의 변덕을 부렸던 셈이다.
요컨대 식민지기의 조선사회는 근대적인 시장제도가 장착된 근대사회였다. 거기서 인간들의 경제적 선택과 상호작용은 그가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또 양자의 관계가 아무리 폭압적인 외양을 취하든, 본질적으로 근대적인 법과 제도의 규범에 구속된다. 거기서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재산을 문자 그대로 약탈할 수는 없으며, 그것은 범죄행위로 규정된다. 이 근대사회의 기본 공리(公理)는 총독부 권력과 조선 농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아무리 피지배 민족으로부터의 대의제적 동의가 결여되었다고는 하나 총독부의 징세 행위는 법률에 근거하였다. 그러니까 총독부가 농민들로부터 총칼로 쌀을 마구 빼앗아 일본으로 실어 가는 일은 원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쌀이 일본으로 유출된 것은 절반 이상의 생산량을 소작료 수입으로 장악한 일본인과 조선인 지주들이 쌀값이 3할 정도 높은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였기 때문이다. 값싼 양질의 조선 쌀이 일본에 유입되자 일본 농민들의 원망이 컸다. 마치 오늘날 한국정부가 쌀 시장을 개방하자 미국과 중국 쌀이 들어와 우리 쌀농사를 망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일본정부는 식민지에서 쌀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는 관세가 폐지된 통합시장이기 때문이었다. 쌀을 수출한 지주들은 크게 돈을 벌었다. 지주들에게 축적된 거대 자본은 각종 회사나 공장이나 은행으로 출자되어 식민지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렇게 식민지라는 지역경제에서 농민, 가계, 지주, 기업 등 여러 경제주체 상호간의 재화와 소득의 흐름은 점점 커져갔다. 그 식민지적 경제순환에서 한국인의 분배분이 과연 커지고 있었는지는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몫이 작아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함부로 예단할 문제가 아닌 셈이다.
식민지기에 대한 경제사 연구자들의 이 같은 설명에 대해 많은 국사학자들은 동의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격렬한 분노를 터뜨린다. 나에게 불만이 많은 어느 국사학자는 술자리에서 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 선생, 식민지기의 역사는 독립운동의 역사야, 다른 것은 역사라고 할 수 없어.” 나는 그 말이 전적으로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대다수의 인간들을 그 속에 포섭하고 있는 사회 및 경제의 기초 제도와 원리를 무시하고서는 독립운동이 불가능했을 것이며, 실제의 독립운동도 그러하지 않았다고 나는 믿고 있다. 나는 두 주장이 식민지기에 관한 상이한 차원의 이해이지 불상용(不相容)의 모순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식민지기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근대 사회과학의 기초적 방법론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국사 교과서는 지난 30년간 식민지 지배 하의 조선에 어떠한 형태의 법과 제도도 없었던 것처럼, 그것들로 대표되는 어떠한 수준의 문명도 결여되었던 것처럼 한국인들을 가르쳐왔다. 강도와 같이 침입해 온 총독부 권력은 총칼을 휘두르면서 토지조사사업에서 또 산미증식계획에서 한국인들의 토지와 식량을 마음껏 유린하였다. 마치 근세 서유럽의 중상주의(重商主義) 시절에 악덕 모험상인들이 신대륙이나 미개지에 들어가 원주민을 속이고 약탈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장면을 국사 교과서는 상정해 왔다. 과연 전통 한국사회의 문명이 그렇게 낮은 수준이었단 말인가? 국사 교과서는 일제를 비판하고자 했지만 엉뚱하게도 자기 자신을 형편없는 문명으로 비하하는 균형 잡히지 못한 역사의식을 국민에게 심었을 뿐이다.
Ⅳ. 일본군위안부의 강제동원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전시기의 일제가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순결한 처녀들을 강제동원하여 일본군위안부(이하 위안부로 약칭)로 삼은 천인공노할 반인륜 범죄에 대해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 그 분노는 오늘날의 일본정부가 위안부 생존자에 대한 공적 배상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국인들의 공통된 시각과 일본정부에 대한 요구는 매우 강고하며 전혀 흔들림이 없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이해와 해결방식이 국내에서 공개적인 논쟁을 벌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언제부터 한국인들은 정신대 또는 위안부에 관해 그 같이 확고한 인식과 입장을 취해 왔던가. 역사가는 그의 직업윤리 상 자칫 몰매를 맞을지도 모를 이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국사 교과서에서 정신대에 관한 언급이 처음 나오는 것은 1952년 신석호가 쓴 교과서에서이다(申奭鎬 1952: 213).
노소·남녀를 물론하고 혹은 징용, 혹은 징병, 혹은 학병, 혹은 보국대, 혹은 정신대(挺身隊) 등으로 붙들어 가서 맘에 없는 과중한 노동을 시켰기 때문에 죽은 자가 심히 많았으며, 최후에는 소위 국민 의용대를 조직하여 전 민족을 전쟁에 몰살시키려 하였으며…….
정신대에 관한 신석호의 이 같은 서술은 1962년 발행의 그의 교과서에서까지 한 자귀의 수정도 없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후 1973년에 그가 쓴 교과서에서는 정신대에 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언제부터 정신대에 관한 기술이 생략되기 시작했는지 추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무척 흥미로운 점은 위의 기술에서 정신대가 위안부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징용, 징병, 학병, 보국대 등과 함께 열거된 다음, ‘과중한 노동’에 사역된 존재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가 병사를 접대한 행위를 ‘과도한 노동’이라고 표현했다고 읽기는 한국인들의 일반적 언어감각에서 무리이다. 말하자면 신석호의 교과서에서 정신대는 공장 등에 동원된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정신대가 원래 그러한 것이었음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영국·소련의 연합국이 여성 노동을 군수공장에 동원하였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일제도 그에 자극을 받아 전장으로 끌려간 남자의 빈 자리를 여자로 채우고자 했는데 바로 그것이 정신대이다. 정신대라는 말이 최초로 나온 것은 1943년 9월 일본정부의 차관회의에서이며, 1944년 3월에는 내각에서 「여자정신대강화방책요강(女子挺身隊强化方策要綱)」이 결의되었다(井上節子 1998: 7-14). 그에 의하면 14세 이상의 미혼여성을 자발적으로 학교·지역·직장을 단위로 정신대로 조직하여 군수공장에서 노동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때까지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참여를 전제한 것이어서 볼 만한 실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일제는 1944년 8월에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勞令)」을 발동하여 12-40세 미혼여성을 산업현장으로 강제동원한다. 그렇지만 이 법령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였지 식민지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발동되지는 않았다. 식민지에서 정신대가 조직된 최초의 사례는 1943년 11월 서울 시내의 접객업소에 종사한 남녀 가운데 3,349명(내 조선인 2,454명)의 여자들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어 1944년 3월에는 여자정신대 제1대가 평양의 공장에, 4월에는 고녀생 제1회 정신대가 인천의 조병창(造兵廠)에 투입되었다. 뒤이어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군수공장에 투입된 정신대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 정확한 총수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이러한 전시기의 동원체제를 신석호는 나이 40에 목도하였다. 그러했던 그가 1952년에 그의 교과서에서 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 때 그 뜻이 애매할 수는 없었다. 앞서 해설한대로 그것은 군수공장 등에서 ‘과중한 노동’에 시달린 연약한 여성들을 가리켰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대 신화가 생겨난 과정과 관련하여 한 가지 중대한 전제를 발견한다. 말하자면 신석호가 국사 교과서에서 정신대라는 용어를 구사한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이 정신대와 위안부를 동일시하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성립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러한 집단기억이 강하게 성립해 있었다면, 신석호의 정신대 기술이 원래 위와 같은 형태일 수도 없거니와 그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항의가 그 같은 정신대 기술을 10년 이상 교과서에서 건재하도록 방치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1960년대 이후부터 생겨난 것임에 틀림없다.
잠시 위안부의 역사를 소개한다. 최초의 위안소는 1932년 상하이의 일본 해군기지의 주변에서 생겨났다. 현지 부대장의 재량으로 병사들의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기지 주변의 유흥업자들에게 일본군 전용의 위안소를 설치하고 경영을 위탁한 것이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수뇌는 중국 및 동남아 전역의 일본군 주둔지에서 대체로 병사 100명 당 1명의 위안부를 충원하는 위안소를 설치하도록 훈령을 내렸다. 그 중 최전선에 속하는 일부를 제외한 대개의 위안소가 민간업자들에게 위탁 경영되었다. 위안부는 주로 일본·중국·한국 세 민족으로 구성되었는데, 말기가 될수록 한국 여자의 비중이 커졌다. 그 정확한 숫자에 대해선 구구한 추측이 있다. 위안소 경영주 가운데는 한국인도 있었다. 한국 여자가 많은 위안소는 대개 한국인에 의해 경영되었다. 위안부의 모집은 위안소 경영주나 그들의 대리인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일본군과 총독부는 알선이나 도항증(渡航證)의 발급으로 그에 적극 협조하였다. 모집책에 의한 위안부의 모집에는 광범한 인신약취와 취업사기가 동반되었다. 생존 위안부 175명의 증언에 의하면, 62명이 협박 및 폭력에 의해, 82명이 취업사기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다(정진성 2004: 66). 위안부들은 위안소를 함부로 이탈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사실상의 구금상태에서 병사들의 위안을 강요받았다. 그들은 당시 국제법이 금하고 있는 성노예(性奴隸)였으며, 일제는 노예제를 조직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위안부들은 병사들을 접대한 대가로 군표(軍票) 형태로 소정의 보수를 받고 위안소 주인과 분배하였다. 그렇지만 축적에 성공한 위안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위안부는 주인으로부터 받은 선대금(先貸金) 등을 이유로 빚에 시달렸으며, 전쟁 말기에는 금융망이 마비되어 군표를 현금화할 수 없었던 불쌍한 경우도 많았다.1)
이상과 같이 정신대와 위안부는 그 역사적 경로에서 확연히 다른 두 존재였다. 그리고 전술한 대로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양자를 동일시하는 대중의 집단기억은 성립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해서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이 두 가지를 전혀 구분하고 있지 않을까? 지난 40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되었나. 그 원인을 완벽하게 다 밝힐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몇 가지만큼은 쉽게 머리에 떠올릴 수 있다. 실제 1943∼1945년간 정신대가 비록 자발적인 참여라고 하나 사실상 강제동원되다시피 할 때 민간에서는 큰 혼란이 있었다. 예컨대 학교에 다니는 딸을 중퇴시킨 다음 결혼시키는 소동이 적지 않았다. 필자의 집안에도 가까운 친척 여자의 결혼이 그러하였다. 저항이 불가능한 강력한 외래 권력이 일찍이 없었던 여성노동을 동원한다고 했을 때 식민지 민중의 정신적 공황이 얼마나 심각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위안소에 여자들을 데려가기 위한 모집책들의 사기와 약취가 극성에 달해 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정신대에 가면 위안부가 된다는 소문이,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악성의 유언비어가, 떠돌아다님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 강조할 정도는 아니지만 정신대로 공장에 간 여자들 가운데는 대오를 이탈하거나 공장이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되는 통에 위안부로 떨어진 여자들이 있었다. 생존 위안부 175명 가운데 8명이 그러했다는 증언이 채취되어 있다(정진성 2004: 66).
그러나 나는 이러한 산발적이거나 비체계적인 기억만으로는 대중의 집단기억이 형성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계기와 작용이 있어서 이들 산발적이고 비체계적인 재료들을 잘 다듬어진 민족설화로 가공해 낸 것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국사 교과서의 관련 서술을 유심히 추적해 보자. 신석호의 교과서 이외에서 정신대에 관한 언급이 최초로 보이는 것은 1968년의 교과서에서이다(문교부, 1968: 173).
근로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폭발된 후로 징용령을 실시하여 막대한 노동력을 공장, 광산, 군사 기지로 끌어갔으며 심지어 연약한 여성들까지도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였다. 이리하여 아시아 전역에서 비명에 죽고, 고초를 당한 우리 동포는 수백만이나 되었다.
여기서의 ‘여자정신대’는 그들이 강제동원되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이 없어 그 실체가 매우 애매하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끌려간 곳 가운데 ‘군사 기지’가 있어 그녀들의 성(性)이 일본군에 의해 착취되었음이 강하게 시사되고 있다. 간호부도 아닐진대 정신대란 이름의 여성이 ‘군사 기지’에서 달리 무슨 일을 하였겠는가? 나는 이 1968년의 언저리에서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민족설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망치질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2) 공교롭게도 전술한 대로 일제가 토지의 40%를 수탈했다는 신화도 바로 이 언저리에서 생겨났다. 신화의 속성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 위의 글을 썼으며, 그의 정신세계에서 어떠한 개인적 체험이나 정보가 상호작용을 일으켜 부지불식간에 양자를 오버랩시키게 했는지까지 파헤칠 필요가 있으나 추후의 연구과제로 미룰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1968년 교과서의 정신대 서술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으며, 이후 1978년까지 교과서에서 정신대나 위안부에 관한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다시 나타난 것은 1979년의 국정 교과서에서이며 이후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중등 교과서를 중심으로 서술이 변해온 과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79∼1982년: (일제는) 학도 지원병제와 징병제를 실시하여 우리 학생과 청년들을 전선으로 끌어갔으며 심지어는 젊은 여자들까지도 산업 시설과 전선으로 강제로 끌어갔다.
1983∼1996년: (일제는) 우리 청장년을 강제로 징용하여 공장에서 노동을 시켰고 마침내는 학도 지원병제와 징병제를 실시하여 우리 청년 학생들을 전선으로 끌어갔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자들까지도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었다.
1997∼2001년: 일제는 <중략> 강제 징병제와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에 많은 한국의 청장년들이 각지의 전선에서 희생되었다, 이 때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
2002년∼ : 일제는 여성들도 근로 보국대, 여자 근로 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끌고 가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더욱이 많은 수의 여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아시아 각 지역으로 보내 군대 위안부로 만들어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게 하였다.
1979∼1982년간은 젊은 여자가 끌려 간 곳 가운데 ‘산업 시설’이 있어 원래의 정신대를 가리키는 취지가 엿보이나 동시에 ‘전선’에도 끌려갔다고 하여 곧 위안부로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983-1996년의 14년간에는 “여자들까지도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실제 어떻게 희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여자가 희생되었다고 할 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연상하지 못할 중학생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오랜 기간의 망치질을 통해 드디어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1997년이다. 이후 2001년까지 중등 국사 교과서는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기에 이르러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이 국사의 이름으로 훌륭히 공식화되었다.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집단기억의 성립에는 국사 교과서만이 유일한 공로자가 아니었다. 특히 언론의 부주의하고 심지어 선정적이기까지 한 보도자세가 한 몫을 하였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인의 국민적 관심사로 떠 오른 것은 1992년이다. 그 해에 김학순(金學順) 할머니가 자신의 위안부 경력을 고백함으로써 성노예제를 조직한 구 일본군의 범죄행위를 국제사회에 고발하였다. 당시 도하 신문과 방송에서 위안부에 관한 공식 호칭은 거의 정신대 일색이었다. 역사가라고도 할 수 없는 어느 교수는 1944년 8월의 「여자정신근로령」을 낡은 법전에서 찾아 낸 다음, 일제가 순결한 여학생들을 위안부로 대량 동원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왔다고 소란을 떨었다. 그러자 가장 유력한 일간지의 하나가 그의 주장을 그대로 1면의 톱기사로 보도하였다.
1997년도 교과서의 극단적인 오류는 2002년에 이르러 수정되었다. 앞서 인용, 소개한 대로 2002년도 교과서는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별하여 전자가 노동력의 착취임을, 후자가 성의 착취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같은 수정은 역사를 사실에 근거하여 써야만 하는 역사가의 직업윤리에서 볼 때 환영할 만한 일이다. 저간에 위안부 문제에 관한 국내의 높아진 연구수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거기서는 아직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지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하여 위안부를 일제가 동원한 정신대의 부분집합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한번 만들어진 민족설화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좀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Ⅴ. 맺음말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지난 20세기 전반의 식민지기와 관련하여 그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몇 가지들, 예컨대 일제가 대규모 토지를 수탈하였다거나 대량의 쌀을 약탈하여 실어 날랐다든가 전시기에 여자정신대를 동원하여 일본군위안부로 삼았다든가 하는 대중적 이해는 역사가의 시각에서 지적하자면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오해가 국민의 집단기억으로 성립한 것은 이 글에서 추적한 대로 한국의 국사 교과서가 학생들을 그렇게 가르친 효과가 장기간 누적됨에 의해서이다. 해방 후부터 국사 교과서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사실관계의 왜곡은 없었던 편이다. 신화가 만들어지는 조짐은 1960년대부터 조금씩 관찰되며, 1974년 이후 교과서 편찬제도가 국정으로 바뀌면서 전면화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의 40%가 수탈되었다는 이야기가, 식량의 절반이 수탈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교과서에서 정설로 자리 잡는 것은 1974년부터이다. 1932년부터 존재한 위안부를 1943∼1945년간의 정신대와 혼동하는 교과서의 서술은 1979년부터 1997년까지의 18년간에 걸쳐 서서히 완성되었다.
국민국가가 그의 국민을 고급스런 문명인으로 교육하고자 하는 그 교과서에서 사실관계에 기초하지 않은 신화가 근 30년간이나 전파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나 배경은 무엇일까? 이 글은 거기까지 충분히 추적하지 않았다. 그것은 장래의 연구과제이다. 한 가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과서 집필자들의 질적 수준이다. 특히 국정(國定)제도로 바뀐 이후 그 문제가 심각하였다. 예컨대 토지의 40% 수탈설의 경우 그 40%라는 수치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를 근 30년 동안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따진 적이 없음은 솔직히 말해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3) 그것도 처음에는 ‘전국의 토지’라 했는데 언제부턴가 ‘전국의 농토’로 표현이 바뀌고 있다. 심지어 같은 해의 중등 교과서와 고등 교과서의 표현이 ‘토지’와 ‘농토’로 서로 다르다. 그 둘의 뜻이 같지 않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만, 교과서 집필자들은 그에 대해 무신경하였다. 대개 그들은 전임자가 쓴 것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기본 줄기는 그냥 답습하고 나머지 가지 부분은 마치 수필을 쓰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이러 저리 표현을 고쳤던 것이다. 정신대와 위안부에 관한 각 연도의 기술도 집필자들이 정성을 다해 정확히 쓴 것이라기보다 기존의 교과서를 적절히 윤색하다가 우연히 양자를 등치시키는 그 곳에까지 다다랐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지만 교과서의 집필자들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국민을 정치적으로 동원함에 신화를 필요로 하였던 정치인들, 신화를 기꺼이 수용하였던 국민 대중, 나아가 이들 모두를 포섭한 20세기 후반 한국사회의 문명, 그 비교사적 수준과 구조적 특질, 이 모두가 신화 만들기의 주역과 조연으로서 앞으로 우리가 추적해야 할 대상들이다.
나는 이 글을 20세기 전반 한·일 양국의 불행한 역사를 초래함에 중대한 책임이 있는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식민지 지배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안도감을 주기 위해 쓴 것은 결코 아니다. 솔직히 말해 그 점에 대해 우려가 없지 않지만, 그 점을 회피하기 위한 전술적 고려에서라면 기존의 통념을 뛰어넘는 어떠한 글도 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이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개의치 않는다. 나는 역사가로서 역사의 신이 주관하는 법정에 선 증인과 같은 심정으로, 오직 진실만을 말하리라는 선서에 기초하여, 말할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글에 대해 한국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개의함이 있다면, 이 글이 한국인들이 그들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로부터 주체적인 책임의식과 통합적인 성찰을 얻음에 약간의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책임의식과 성찰이 배제된 역사의식은, 다시 말해 다른 민족과 다른 인간에 대한 비난과 분노만의 역사의식은, 국가 간에 또 사회구성원 간에 갈등과 대립만을 야기할 뿐이다. 거기서는 배려와 협동의 미덕을 상실한 인간들이 거칠게 충돌할 뿐이다. 나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각 층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갈등과 대립의 현장을 목도하면서 우리 한국인들이 이미 그러한 충돌의 소용돌이에 깊숙이 빠진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 소용돌이의 원천에는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정의한 신화의 마성이 작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점을 다시 한번 경계해 둔다.
* 2004년 11월 <한일연대 21>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1) 이상과 같은 위안부의 역사와 관련하여 주로 참고한 전문 연구서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7), 요시미(1999), 秦郁彦(1999), 尹明淑(2003), 정진성(2004) 등이다. 개략적인 서술이기 때문에 예민한 논점과 관련하여 일일이 주기를 달지 않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2) 이 글의 초고를 읽은 朴枝香 교수는 이 대목에서 필자가 논리를 비약시키고 있다고 충고하였다. 박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 부분을 수정할 의향이 전혀 없지 않았지만 원래대로 그냥 두었다. 내가 논리를 비약시키고 있다기보다 읽는 사람마다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교과서 서술의 애매함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3)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검토하지는 않았지만 2002년 이후 국사 교육의 현장에 종사하고 있는 교사도 함께 집필진에 참가하고 있는 『한국근현대사』라는 교과서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숫자가 함부로 제시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김한종 외 5인은 위안부로 동원된 수를 ‘수십만’ 명으로, 한철호 외 5인은 위안부로 된 여자를 포함한 정신대의 수를 ‘수십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수십만’이란 숫자의 근거도 이해할 수 없지만, 설령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서로 달리 인용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김광남 외 4인은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의 총수가 ‘650만’이라고 쓰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 교과서에 이렇게 소설 쓰듯이 근거 없는 수치를 함부로 열거해도 되는지 필자는 참으로 회의적이다.
“청년들이여, 낡은 역사관을 버려라”
Ⅰ. 어떻게 볼 것인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외교권을 넘기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대한제국은 5년간 일제의 보호국으로 있다가 1910년 8월에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 5년간에도 대한제국은 형식상 체통을 유지하였고, 또 엄밀히 말해 식민지화의 비극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아주 막힌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결과를 두고 볼 때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17일에 사실상 망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강의실에서 아예 그 날부터 일제 하의 식민지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지금부터 정확히 100년 전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어떠한 역사관을 가져야 옳은가라는 주제로 쓰고 있다. 그 주제를 100년 전 대한제국이 멸망한 사건을 중심으로 풀어가도록 하자.
우선 그 사건을 대하는 현대 한국인들의 올바른 자세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2∼3년 전부터 나는 2005년이 되면 한국의 역사학계와 사회과학계가 그 사건의 경위와 그 역사적 의의를 두고 매우 활발한 학술적 토론의 장을 마련할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워낙 중요한 사건이고 마침 100주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5년을 거의 다 보낸 지금 돌아보니 나의 짐작은 틀려도 한참 틀렸다. 정치권과 그에 협조하는 일부 역사가들이 중심이 되어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는 소리는 매우 높다. 그렇지만 그 사건이 왜 발생했으며, 그 사건은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라는 성찰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원래 중·고등학교의 국사교과서에서부터 그러하다. 국사교과서를 보면 1904년 러일전쟁까지의 역사가 이야기되다가 갑자기 역사의 무대가 바뀌어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언제 어떻게 나라가 망하였는지에 관한 서술이 없다. 그러니까 아직도 한국의 공식 역사학계에서는 그 부끄럽고 슬픈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정면으로 들려줄 용기를 내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는 어쩌면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체면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을 듯하다.
언젠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의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조선의 국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외교문서에 사인을 하면서 ‘臣 아무개’라고 적은 문서가 그 가운데 있었다. 내 앞에서 이전 정부의 고위 관직을 지낸 어떤 분이 “저 신(臣) 자를 좀 가리지 그냥 두냐”고 역정 비슷한 소리를 하는 것을 뒤따라가면서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떳떳치 못한 역사는 가려져야 한다는 체면주의는 개인이나 가문과 같은 私의 역사라면 몰라도 국가의 흥망성쇠와 같은 천하 公의 역사에서는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대한제국, 곧 조선왕조가 망한 이야기에 기분이 좋을 한국인은 아무도 없다. 당시 나의 증조부는 40대의 장년이었다. 그 얼굴이 가물가물한 나의 할아버지는 1885년생이시니 정확히 20세의 청년이었다. 그 분들은 조선왕조의 충직한 백성이었다. 철 따라 그 분들의 묘소를 살피고 또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나도 아직은 조선왕조의 백성인지 모른다. 가끔은 그런 백성의식의 발로에서인지 나는 우리에게도 왕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느 일본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일본인이 예절 바르고 사회가 질서정연한 것은 천황의 존재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천황의 나라에 살고 있으니, 신하된 도리로서 조용하게 예절 바르게 살다갈 일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발달된 민주주의를 보면 턱도 없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가끔 한국의 소란스런 사회와 정치에 기분이 상할 때면 그런 백성의식이 발동하여 우리에게도 왕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런 심정은 조금 나이든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 보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 만큼 조선왕조의 멸망은 현대 한국인들에겐 아직도 동시대의 사건으로서 애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한국인이면 누구든 주먹을 불끈 쥐고 조선왕조를 침입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한다. 북한은 아직도 일본을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는”(不俱戴天) 원수라고 한다. 무엇보다 고약한 자는 일제에 협조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등의 을사오적이다. 그들에게 덮어씌워진 ‘매국노’란 지상최대의 불명예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금도 식을 줄 모르고 있다.
그렇게 그 사건을 두고 한국인들이 보이는 더 없이 격렬한 집단적이며 감정적인 대응의 저변에는 조금 전에 지적한 체면주의와 백성의식이 가로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나를 낳아 주신 할아버지가 그 시대의 백성이었고 그 백성의 주인인 왕조의 체면은 결국 나의 체면이라는 논리이다. 그렇지만 한국사회가 선진적인 문명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체면주의와 백성의식으로부터 과감히 해방될 필요가 있다. 도대체 조선왕조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조선왕조 시대에 국가의 주인은 왕이었다. 하늘이 왕을 낳았고 그 왕이 다시 백성을 낳았다. 왕은 백성의 부모요, 백성은 왕의 발가벗은 아기이다. 이것이 조선왕조를 떠받친 정치철학이었으며, 왕조가 망할 때까지 그에 큰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의 증조부와 조부는 그 시대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조선의 왕은 조정에 참여하는 양반의 특권을 보호하고 지지하였다. 백성을 다스린 것은 그 양반이었다. 조선왕조가 망한 것은 그 왕과 양반의 지배공동체가 정치를 잘못하고 외교를 그르쳤기 때문이지 뭍 백성들이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반면에 오늘날의 한국인은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서는 시민이 사회와 국가의 주인공이다. 국가는 사회로부터 파생된 이차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 국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민을 갈 수도 있다. 건국 후 지금까지 그렇게 이민 간 사람이 한국인구의 1/10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들의 남아 있는 친척과 친지를 따지면 한국인의 1/3이 탈국가 시대에 세계인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런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역사의식과 정치철학에서 자유롭고 자립적인 문명인이다. 역사라는 주민의 집단기억을 체면주의와 백성의식으로 짠 것이 전근대의 역사학이다. 현대의 문명인은 일체 그러한 전근대의 집단기억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는 여러 인간집단을 하나의 안정적인 질서체로 통합하는 정치적 메커니즘이다. 결국 국가는 그가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문명 수준을 대변하고 상징한다. 이에 국가가 망한다는 것은 한 시대의 문명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1905년 조선왕조의 패망도 결국은 마찬가지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어찌 그 막중한 역사적 의의를 간악한 일본이 쳐들어 왔기 때문이라든가 소수의 매국노가 준동을 부린 탓으로 왜소화해 버리고 말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1905년 조선왕조의 패망은 그 왕조에 정치적으로 통합된 인간집단이, 특별히 정치적 선택의 책임을 졌던 지도계층이, 무엇을 어떻게 잘못하면 국가를 망하게도 할 수 있는가를 그들의 후손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한국인에게 참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다시 말하여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자립적인 현대 문명인으로서 그 시대의 그 사건을 냉정히 객관화하고, 그로부터 선진 사회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교훈을 새로운 역사의식으로 도출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Ⅱ. 도덕적 세계관, 잘못된 일본관
1904년의 일이다. 스웨덴의 아손 크렙스트라는 신문기자가 서울을 방문하여 몇 달간 머물렀다. 어느 날 그는 조선의 형벌제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여 오늘날 국세청이 자리하고 있는 종로1가의 전옥서(典獄署)를 찾아 갔다. 그를 맞은 전옥서의 책임자는 크렙스트의 몸에 뿔이 없음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장시간 신체검사를 까다롭게 진행하였다.(김상열 역, <코레아코레아>, 미완, 1986, 224-225면). 당시 전옥서의 책임자라면 오늘날 서울형무소의 소장에 해당하니 중앙부처의 국장급이다. 그런 고위 관료가 1904년 그 때까지 서양인의 몸에 뿔이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이 사례는 당시까지 조선왕조의 지성계가 세계 실정에 얼마나 어두웠는지를 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의 왕과 지배집단이 폐쇄적이고 관념적인 세계관으로 인해 대외관계를 그르쳤다는 비판은 실은 너무나 자주 거론되어 온 것이어서 새삼스레 꺼내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 무슨 대외관계를 어떻게 그르쳤는가라고 따지면 연구자들의 의견은 크게 갈라진다. 예컨대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에 대해 주로 국사학계의 연구자들은 김옥균 등이 일본의 지원을 기대하고 정변을 일으켰다는 이유에서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에 주로 외교학계의 연구자들은 당시 조선이 중국에 예속되어 있었으므로 김옥균 등의 거사는 거의 불가피했다고 좋게 평가하고 있다. 나는 후자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1876년 이전 조선왕조는 조공과 책봉으로 상징되는 중화제국의 제후국으로서 존속하였다. 중국의 집권자들은 그러한 제후국도 넓은 의미의 중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적 국제질서에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이 도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제1조는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로 되어 있다. 이 조문에는 조선은 더 이상 중국의 제후국이 아니라는 일본의 입장과 그러한 일본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수용한 조선의 입장이 모두 담겨있다. 조선이 일본의 요구에 순응한 것은 예전부터 일본과의 관계에서 자주국으로 대등한 외교를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약 이후에도 조선은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지 않았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문서에서 중국을 가리킬 때 자주 상국(上國)이라 불렀다. 조선의 집권자들은 한편으로는 자주국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제후국이란 이중의 국체 의식을 별 어려움 없이 그대로 보유하였다. 그에 대해 일본은 강력히 항의하였다. 조선 내에서도 중국과의 외교를 대등한 관계로 바꾸어야 한다는 개화파의 주장이 제기되어 무언가 바람직한 변화가 모색될 참이었다.
그렇지만 1882년에 우연히 발생한 임오군란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 중국이 난당을 진압하고 국왕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한 다음, 임오군란으로 집권한 대원군을 중국으로 압송해 버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과 중국의 관계가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가 국제사회에 하루아침에 폭로되고 말았다. 중국이 임오군란의 소식을 맞아 신속히 군대를 파견한 것은 실은 그 전부터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879년 일본이 중국의 조공국인 오키나와를 병합해 버린 사건은 중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주일공사 하여장(何如璋)을 중심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장악할 필요성이 중국정부 내에서 거론되고 있었는데, 마침 임오군란이 그 좋은 명분을 제공한 셈이었다.
중국이 3천의 군대를 서울에 파견할 때 사전에 주권자 고종의 동의를 구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후 고종은 중국과의 사대관계에 충실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이 중국의 번방(藩邦)임을 명시한 중국 측이 제시한 조약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후 중국에서 파견되어 온 멜렌도르프가 외교권을 장악하고 일본과의 조약개정과 미국·영국과의 조약체결을 주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과의 조약체결에서 중국은 조선이 중국의 번방임을 조약 서문에 명기하고자 하였지만 미국이 거절하였다. 이에 중국은 고종으로 하여금 미국 대통령에게 동일 내용의 외교 조회를 보내게 하였지만 미국은 그 문서를 묵살하였다. 미국이 그렇게 한 것은 중국의 번방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는 자국의 체면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이 자주국임을 주장하는 일본의 입장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악성의 불평등조약은 국내에서 외국상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용한 영국과의 조약에서 맺어졌다. 그렇게 될 일도 아니었는데, 멜렌도르프라는 외교권을 장악한 중국의 대리인이 그렇게 처리하고 만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나는 당시 열국쟁패의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왕조를 반식민지적 종속상태로 내 몬 주범은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중국 군대가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불리한 여건에서 쿠데타를 감행한 것은 중국으로부터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충정에서였다고 평가한다. 김옥균이 실패하자 일본은 중국과의 한판 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하고 본격적으로 군비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이후 1945년까지 이어진 동아시아의 비극은 원래 그 진원이 서울에 있었다.
이후 1892년 중국군이 자발적으로 철수하기까지 근 10년간 고종과 집권세력이 중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자주 외교와 국방을 추구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조선정부는 중국의 후견과 보호에 기대어 일본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하는 외교 전략을 택하였다. 그러한 전략이 합리적이었다고 평가되기 위해선 중국의 후견이 최후의 순간까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는 판단과 일본은 도저히 중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양국의 군사력에 대한 판단이 모두 옳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역사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틀렸음을 증명하고 말았다. 양국의 군사력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판명되었다. 중국의 후견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였는지는 뒤늦게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서 밝혀진다. 당시 2천 년의 왕정을 폐지한 중국의 혁명군은 주변의 여러 복속 왕조를 폐하고 그 지역을 중국의 판도에 편입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의 거대한 중국이 탄생한 것이다.
고종과 집권세력의 두 가지 잘못된 전략적 판단은 그 배경을 이룬 세계관이랄까 국제사회에 대한 질서감각의 문제까지 파고들어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고종과 집권세력이 보유했던 전통적 세계관에서 세계의 중심은 중화제국이고 조선은 그 도통을 이어받고 있는 소중화(小中華)였다. 이 도덕주의적 세계관에서 일본은 바다 가운데 조그만 섬의 오랑캐였다. 나는 청일전쟁의 결과가 판명될 때까지 고종은 일본이 자신의 왕조보다 연간 국민소득이 10배나 많고 중앙재정은 무려 20배나 큰 나라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짐작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바다 가운데 오랑캐가 무례하게 천황을 칭하면서 나타나니 고종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였겠는가? 1894년 이후 고종에게는 13년간의 시간이 더 있었다. 그 기간 그가 어떻게 최악의 선택을 거듭해 왔는지에 대해선 너무 장황하기 때문에 쓰지 않겠다.
만약 고종이 중국과의 관계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고 일본과 적절한 신뢰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한반도를 통한 중국과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물론이요, 동아시아의 20세기 역사는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조선의 식민지화는 고종의 맹목적인 반일 외교 전략이 초래한 최악의 결과였다. 나는 무어라 해도 고종을 이해하거나 좋게 평가할 생각이 없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식민지화라는 엄청난 재난을 초래한 자초지종을 두고 역사의 신 클리오가 주재하는 청문회가 열렸다 치자. 제일 먼저 소환당할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시의 집권자 고종이다. 그런데도 최근 일부 역사가들이 고종을 계명군주로까지 칭송하고 있으니 참으로 엉뚱한 일도 다 있다는 느낌이다.
Ⅲ. 궁핍한 도덕경제
조선왕조가 망하게 된 수많은 이유 가운데 위의 것 이외에 한 가지만 더 추가하라면, 필자의 전공과 관련된 것이긴 하지만, 19세기에 걸친 조선 경제의 침체를 들고 싶다. 결국 나라가 너무 가난해져 외적이 침입해 왔지만 신식 병기로 잘 무장된 군대를 조직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구한말 당시 대한제국의 군대는 서울 주변에 배치된 약 2천 명의 소총 부대가 전부였다. 쓸 만한 대포나 군함은 없었다. 그러니 일본군과 중국군이 서울 드나들기를 제집 마당처럼 하였다. 그런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그렇게 형편없이 가난해지고 말았던가?
지난 몇 년간 이에 관한 연구성과가 이전에 비해 제법 많이 쌓였다. 주로 남부지방에서 수집된 다수의 사례에 의하면, 일정 면적의 논에서 나온 소작료가 19세기 내내 조금씩 감소하여 1880년대가 되면 19세기 초에 비해 거의 1/3 수준으로 낮아졌다. 논농사의 생산성이 점점 낮아졌기 때문이다. 밭농사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 결과 쌀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지방의 물가기록에서 다른 곡물가격에 대비된 쌀의 상대가격이 상승하는 추세였음을 통해 잘 증명되고 있다.
시장도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우선 대외무역이 그러하였다. 1810년대 이후가 되면 일본과의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두절되고 그에 따라 동래의 왜관(倭館)에서 벌어진 양국 상인들의 무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서해와 남해를 오가던 상선의 수도 확실히 줄기 시작하였다. 장시와 장시를 오고가던 행상들의 발걸음도 뜸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각 장시의 물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 전까지 그런대로 잘 통합되었던 농촌시장이 서로 갈라져 단위 시장의 규모가 작아졌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시장이 축소되자 생산에 대한 자극도 둔해져 결국 총생산이 정체하거나 감소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재정수입도 감소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적자재정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에 따라 농민에 대한 조세 수탈이 강화되고, 그에 맞서 농민들의 난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민란(民亂)을 맞아 조선왕조의 정치적 통합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무엇 때문에 이 같은 문명사의 비극이 초래되었던가? 왜 비극은 그 조짐의 단계에서 봉쇄되지 못했던가? 가장 중요했던 이유로써 필자는 삼림의 황폐를 들고 싶다. 한반도에서 삼림이 황폐해지는 것은 18세기 중엽부터이다. 이후 1911년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의 산지 가운데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한 32%만이 임야를 이루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산지는 문자 그대로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이거나(26%) 나무가 좀 있다고 하나 1헥타르의 나무를 다 잘라 쌓아도 10㎥ 이하에 불과한 거의 헐벗은 상태였다(42%). 그렇게 산에 나무가 없으니 조금만 비가 와도 토사가 흘러 내려 수로를 막고 논밭을 뒤덮어 농사를 망쳤다. 마치 오늘날의 북한 농업과 똑같은 상황이 19세기 조선의 농업이었다.
삼림이 그토록 황폐해진 것은 인구증가로 인해 식량과 연료의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1917년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끝냈을 때 한반도의 논밭 경지면적은 487만 헥타르였다. 그런데 1870년대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의 경지면적이 484만 헥타르였다.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의 국토 면적은 한반도의 두 배 가량이다. 그런데도 19세기의 경지면적은 조선과 일본이 같았다. 이 사실은 19세기의 조선이 얼마나 산지를 활발히 개간하였는가를 생생히 이야기하고 있다. 산지를 논밭으로 일구면 개간자는 개인적으로 득을 볼지 모르지만 기존의 농지에 피해를 주기 마련이다. 따라서 일본은 이미 18세기부터 산지의 개간을 엄금하고 그 대신 기존 농지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식량의 증산을 추구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조선은 산지를 개간하는 방식으로 식량 수요에 대처하였다.
이에 따라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지를 조선왕조의 집권세력이 몰랐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후반 조정은 산지의 개간을 금지하는 명령을 자주 발동하였다. 그렇지만 하등의 실효가 없었다. 명령만 내려갔지 실제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챙기지 않았다. 19세기가 되면 그런 명령조차 내려가질 않았다. 가난한 농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인데 어찌 그것을 몰인정하게 막을 수 있겠는가라는 도덕적 명분론에서였다.
조선의 국가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서는 백성이 골고루 잘 사는 균(均)의 상태를 이상으로 하였다. 공자가 <논어>에서 이야기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가난한 것이 아니라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 한다”(有國有家者 不患貧而患不均)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것, 그러한 집단적 생존윤리에 충실한 경제를 가리켜 인류학자들은 도덕경제(moral economy)라고 부른다. 세계의 모든 전근대 사회가 그러한 도덕경제에 속하였다. 반면에 근대의 시장경제(market economy)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도덕경제를 대신하여 개인의 영리추구를 정당화하고 생산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경제윤리가 성립할 필요가 있다. 서유럽에서는 영국이 제일 먼저 그러하였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18세기경 그러한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조선에서는 그러한 근대의 경제윤리가 발달하지 못했다. 도덕경제의 집단적 생존윤리가 여전히 강고한 가운데 인구증가와 환경파괴라는 미증유의 도전을 맞아 조선왕조는 합리적인 대응에 실패하고 말았다.
Ⅳ. 마무리
이 글에서 나는 우선 한국의 젊은이들이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자립적인 문명인의 관점에서, 그리고 한 사회의 문명적 통합체로서 국가가 실패하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라는 문명사적 관점에서, 지금부터 100년 전에 있었던 조선왕조의 멸망이란 역사적 사건에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연후에 당시의 고종과 집권세력이 취한 맹목적인 반일 외교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대 재난을 초래하였으며, 그 바탕에는 세계문명의 중심을 중국과 조선에 둔 도덕주의적 세계관이 깔려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선 경제체제의 장기변동이란 관점에서 조선의 경제는 집단적 생존윤리에 바탕을 둔 도덕경제이며, 그 경제윤리의 지나친 완고함이 인구증가에 따른 환경파괴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요컨대 도덕적 세계관과 도덕적 경제윤리의 ‘도덕’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도덕’, 그것이 조선왕조의 외교와 경제를 실패하게 만들었다. 조선 사람의 정신이 흐릿해진 것도, 문화가 침체한 것도, 비도덕적으로 다투기만 했던 것도, 바로 그 ‘도덕’ 때문이었다. 물론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은 도덕적인 동물이다. 근대의 문명인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누구에도 양도할 수 없는 천부의 권리를 타고 났다는 최고 수준의 보편적인 도덕을 발견하였다. 그러한 근대적 도덕에 시비를 거는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를 실패하게 만든 ‘도덕’은 그러한 근대적 도덕이 아니다. 그 ‘도덕’은 ‘우리’가 문명의 중심이며, 조금 가난하더라도 ‘우리’ 모두 골고루 잘 사는 것이 문명이라는 폐쇄적이며 집단적인 생존윤리의 전근대 도덕이었다.
몇 년 전부터, 특히 이 정부가 들어서서부터, ‘우리’ 또는 ‘우리끼리’라는 턱도 없는 집단윤리가 정치에서 또 남북관계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문명사의 시각에서 볼 때 그러한 집단윤리가 얼마나 불길한 조짐인가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다시 반복한다. 지금부터 백 년 전 조선왕조가 멸망한 것은 바로 그 ‘우리’라는 집단적 생존윤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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