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이야기" 이영훈 지음 http://goo.gl/rYa7Yv
이영훈 서울대 교수
위안부와 정신대는 다르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군에는 군 시설의 일부로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젊은 여인들이 위안부로 수용되어 군인과 군속들에게 성적 위안을 제공했습니다. 그 가운데 상당수의 조선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여인들에겐 행동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성적 위안은 여인들의 인사에 반하여 강요되었으며, 여인들은 거부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외출의 자유조차 박탈되었습니다. 그녀들은 노예와 마찬가지 신세였습니다.
세상사가 다 그러합니다만, 분노가 지나친 격정으로 흐르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냉정하게 책임을 추궁하는 데 격정의 분노는 경우에 따라 장애가 되기 때문이지요. 사건의 내용을 잘못 알거나 본질을 잘못 짚으면 쓸데없는 논쟁만 생기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범죄를 다룸에 있어서 마치 재판정에서 진실을 다투는 법률가처럼 엄숙하고 냉철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재인식》의 편집에 있어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두 편의 논문을 추천하였습니다. 저의 추천 위도는 그러하였습니다. 여태껏 한국인들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잘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건의 복합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지요.
우선, 한 가지 지적해 둘 점은 위안부와 정신대(挺身隊)는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점을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만, 그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시초문이라며 놀라워합니다. 그만큼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정신대 하면 곧바로 일본군 위안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일제가 조선의 순결한 처녀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소개하겠습니다만, 중·고등학교의 역사교과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으니 그렇게 아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교과서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쓰고 있는《국어대사전》(금성출판사)에서도 ‘정신대’를 찾으니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의 위안부로 강제 종군한 한국 여성들의 대오”라고 되어 있군요. 인터넷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정신대’는 “식민지의 여성들을 강제로 징용하여 일본 군인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만든 성적 노예집단인 종국위안부를 일컫는 말”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가 무려 20만이나 되었다고 하는군요. 이 수치는 한때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도 인용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위안부와 정신대는 내용이나 경위가 전혀 별개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그에 관해서는 <국사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성과 그 신화성>(《시대정신》28, 2005)이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요, 보다 자세하게는 그 글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정신대는 일제가 전시기에 여성의 노동력을 산업현장으로 동원한 것을 말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영국 등의 연합국도 남자들이 군대에 나가 자리가 비자 여자들을 군수공장으로 동원했습니다. 일제는 그 점에서 연합국보다 오히려 늦었던 편입니다. 일본에서 정신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는 것은 1943년 9월부터이며, 공식 결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1944년 3월로 알려져 있습니다. 14세 이상의 미혼 여성들을 자발적으로 학교, 지역, 직장 단위의 정신대로 조직하여 군수공장으로 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별 효과가 없자 1944년 8월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勞令)’이란 법령을 발동합니다. 이 법에 따라 12~40세의 미혼여성이 국가에 의해 공식 동원되어 군수공장에 보내졌습니다.
조선에서는 이 법이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1944년 그해에 시행된 징병제(徵兵制)나 징용령(徵用令)에서처럼 국가가 행정력을 발동하여 여자들을 공식 동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상 동원과 같은 강제가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만,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관의 모집과 알선에 지원해서 나가는 식이었습니다. 예컨대 여학교의 교사가 여학생들에게 나라를 위해 정신대로 나가라고 권유하였는데요, 권유를 받는 여학생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강제와 같았던 것입니다. 조선에서 정신대가 조직된 최초의 사례는 1943년 11월 서울시내의 접객업소에 종사한 3,349명의 여자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뒤이어 1944년 3월에 여자정신대 제1대가 평양의 군수공장에, 4월에는 고녀생 제1회 정신대가 인천의 조병창(造兵廠)에 투입되었습니다. 뒤이어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군수공장에서 노동한 정신대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그 정확한 총수에 대해서는 자료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나고야에 있는 미츠비시[三菱] 항공기 공장의 300명 등, 알려진 한에서 정신대가 투입된 공장의 사례들을 모두 합하면 약 2,0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혼동의 기억이 성립하는 과정
정신대의 실체가 원래 이와 같았기 때문에 1950년대까지만 해도 정신대를 위안부로 혼동하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성립해 있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예컨대 1946년에 나온 이태준의 소설《해방전후》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은 메칠 안 남았다고 하지만 특공댄(特攻隊)지 정신댄(挺身隊)지 고 악지 센 것들이 끝까지 일인일함(一人一艦)으로 뻐틴다면 아모리 물자 많은 미국이라도 일본 병정 수효만치야 군함을 만들 수 없을 거요. 일본이 망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 같은 걸 기다리나 보오!
일제가 곧 망할 것이라는 주인공 현의 말을 반박하는 아내의 말입니다. 여기서 정신대는 특공대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실제 정신대라는 말을 일본어사전에서 찾으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각오로 조직된 부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大辭林》). 그래서 원래 정신대라 하면 ‘여자정신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명칭과 목적의 정신대가 있었던 것이죠. 다시 말해 다양한 목적의 특공대가 있었지요. 그러했기 때문에 이태준도 그의 소설에서 “특공댄지 정신댄지”라 하면서 이 둘을 동어반복의 형태로 나열했던 겁니다.
뒤이어 1952년이 되면 신석호 선생이 지은《우리나라의 생활(국사 부분)》이라는 교과서에서 정신대란 말이 다음과 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노소·남녀를 물론하고 혹은 징용, 혹은 징병, 혹은 학병, 혹은 보국대, 혹은 정신대(挺身隊) 등으로 붙들어 가서 맘에 없는 과중한 노동을 시켰기 때문에 죽은 자가 심히 많았으며, 최후에는 소위 국민 의용대를 조직하여 전 민족을 전쟁에 몰살시키려 하였으며(하략)
여기서 정신대는 “맘에 없는 과중한 노동”의 다양한 형태 가운데 하나로 열거되어 있는데요, 앞서 설명한 군수공장으로 투입된 여인들의 근로조직을 가리키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의 접대 행위를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인의 일반적 언어 감각에서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석호 선생의 역사 교과서는 1962년까지 발행되었습니다. 역사교과서의 기술이 지니는 의의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과거사에 대한 국민의 집단기억을 공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역사교과서에서 정신대는 1960년대 초까지 위안부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해방 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오늘날과 같은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일반적으로 성립해 있지 않았던 것이죠. 물론 양자를 혼동하는 개인의 개별적인 기억은 정신대가 모집되었던 1944년 당시부터 있었다고 보입니다만, 저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집단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군요.
1962년 신석호의 역사교과서가 중단된 다음 1979년까지 역사교과서는 정신대나 위안부에 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간에 알게 모르게 국민의 집단기억에 있어서 정신대의 실체가 위안부로 슬슬 바뀌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역시 소설에서 그 좋은 증거를 찾을 수 있지요. 제가 읽어 본 제한된 범위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정신대를 위안부로 묘사하기 시작한 최초의 소설 사례로서 1969년에 나온 김정한의《수라도》(修羅道)를 들 수 있습니다. 소설의 무대는 일정 말기 낙동강 하구의 어느 마을입니다. 이와모도[岩本]로 창씨한 마을의 구장이 처녀들을 정신대로 징발하려 합니다. 김정한은 정신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저희들 말로는 전력 증강을 위한 ‘여자정신대원’이란 것인데, 일본 ‘시즈오카’라든가 어딘가에 있는 비행기 낙하산 만드는 공장과 또 무슨 군수 공장에 취직 시킨다고 했지만, 막상 간 사람들로부터 새어 나온 소식에 의하면 모조리 일본 병정들의 위안부로 중국 남쪽지방으로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이 장면은 여러 가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김정한은 1908년생으로서 식민지기를 몸소 겪은 분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정신대의 원래 뜻을 정확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군수공장으로 간 여자들이라고 말입니다. 그 다음부터가 문제입니다. 막상 정신대로 간 사람들로부터의 ‘소식’에 의하면 중국 남방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 소식은 과연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요. 소설을 좀 더 따라 읽으면 드디어 마을의 여인들이 끌려가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결국 옥이에게 붉은 닦지가 나오고야 말았다. 역시 그놈이었다. 여자정신대원! 일본 병정의 위안부!
소설의 주인공 가야부인의 몸종인 옥이 처녀에게 드디어 ‘붉은 딱지’, 곧 정신대 영장이 발부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역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붉은 딱지’[赤紙]는 군인으로 징병될 청년들에게 발부되는 영장이었습니다. ‘흰 딱지’[白紙]도 있었는데요, 징용 대상자에게 발부되는 영장이었습니다. 여자정신대에 대해서는 붉은색이든 흰색이든 영장이 발부된 적이 없습니다. 전술한 대로 조선에서는 ‘여자정신근로령’이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장을 발부하기 위해 국가는 치밀하게 준비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선 모든 사람의 직업능력을 등록시킨 필요가 있습니다. 호적지를 떠나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오늘날의 주민등록부와 같은 것이 정비될 필요도 있습니다. 동원의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예비 교육도 시켜야 합니다. 실제 총독부는 1938년 발포된 ‘국민총동원법’에 근거하여 이러한 준비과정에 착수합니다. 국민직업능력신고령에 의거하여 국민등록제를 실시하였으며, 기류령(寄留令)을 공표하여 호적지를 떠나 사는 사람들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했으며, 농촌청년을 대상으로 일본말을 가르치고 제식훈련을 시키는 등, 이른바 연성(鍊成)과정을 운영했습니다. 총독부가 1944년 징병제와 국민징용령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이 같은 준비작업이 치밀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을 대상으로 해서는 그러한 준비작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1944년 8월 ‘여자정신근로령’이 발동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실행하려야 할 수 없는 객관적인 여건이었지요.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대로 여자들이 학교나 직장 단위로 정신대로 간 것은 사실상 강제였습니다만 형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지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딱지 같은 것이 발부된 적은 없었던 것이죠.
김정한은 소설가이기 때문에 역사가처럼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당시 붉은 딱지가 조선인을 상대로 발부되었다는 사실, 여인들이 정신대로 나갔다는 사실, 그리고 위안부로 끌려간 여인들이 있었다는 사실 등입니다. 그는 장소와 시간을 달리 하는 이 세 가지 사건을 그 스스로도 당시의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인 1969년에 이르러 어렵지 않게 하나로 통합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이 ‘붉은 딱지’가 발부된 “여자정신대! 일본병정의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소설처럼 쓰인 소설이었지요. 그렇지만 소설의 힘은 위대합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분노하는 국민들의 마음에 소설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정신대를 위안부로 아는 국민의 집단기억은 그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요. 물론 제가 읽었던 좁은 범위의 근거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기억의 집단화, 공식화
이윽고 1979~1982년이 되면 역사교과서에 “젊은 여자들까지도 산업시설과 전선으로 강제로 끌어갔다”는 기술이 나타납니다. 여인들이 전선으로 끌려간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위안부라는 기술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끌려간 여인들이 위안부로 희생되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 교과서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1983~1996년간에는 “여자들까지도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었다”라고 하여 애매하긴 하지만 좀 더 강력한 암시의 서술이 나타납니다. 드디어 1997~2001년의 교과서에 이르면, “이때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했다”고 하여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기술이 명확하게 성립하지요. 이후 2002년부터 지금까지는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지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하여, 약간 바뀌긴 했습니다만, 위안부가 당초 정신대로 동원된 여자들인 점에서는 마찬가지의 서술을 보이고 있습니다.
1997년부터 교과서에서 정신대를 위안부와 등치시키는 기술이 나타나게 된 것은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였던 자신의 과거를 공개하면서 일본정부의 배상을 요구한 사건이 큰 계기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곧이어 일본의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에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공문서가 발견되었지요. 그러자 일본정부도 일본군의 관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뒤이은 양국의 정상회담에서 사죄의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후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가 양국에서 결성되어 생존 위안부를 찾아내고 숨어 있는 자료를 발굴하는 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위안부의 실태와 역사가 상세하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응하여 일본정부는 수상이 생존 위안부들에게 사죄의 편지를 내고 관민 합동으로 ‘국민기금’이라는 자금을 조성하여 대략 3천만 원씩의 보상금을 지급코자 하였습니다만, 한국 측에서는 할머니들이 수령을 거부하면서 일본국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대신 한국정부로부터 위에 상당한 생활지원금을 지급받고 또 매달 70만 원 정도를 생활안정지원금으로 지원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과정에서 일본에서 볼 수 없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한국의 시민단체와 연구자들은 위안부 문제가 불거져 나온 1991년 그때부터 위안부를 정신대로 불러 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도 위안부 문제를 위한 한국의 시민단체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지요. 19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국민의 집단기억은 1990년대에 이르러선 누구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꽤 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1991년 이후 언론의 공로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1992년 어느 신문은 1944년 8월에 공포된 ‘여자정신근로령’을 법전에서 찾아 낸 다음 일제가 한반도에서 조직적으로 위안부를 징발한 확실한 증거를 포착하였다고 일면 톱으로 대서특필하였지요. 이 기사는 지금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도 그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또 어느 신문은 한술 더 떠서 “12~13세의 젊은 생도는 근로정신대에, 15세 이상의 미혼 소녀는 종군위안부로 연행되었다”고 썼습니다. 이렇게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어린 소녀들이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위안부로 강제 연행되었음을 보도하는 가운데, 위안부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는 소설과 영화가 뒤를 따른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97년 국정교과서의 6차 개정에 이르러 위와 같은 기술이 역사교과서에 나타나게 된 것은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였습니다.
앞서 저는 대중의 집단기억으로서 역사는 많은 경우 비교적 가까운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서 백두산 영산설과 일제의 토지수탈설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만, 지금의 정신대 설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약 175명의 여인이 자신이 위안부로 된 불행한 역사를 고백하였습니다만, 그 가운데 당초 정신대로 동원되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점을 증명해 보려고 여러 연구자가 많은 애를 썼습니다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두 역사적 사실은 처음부터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일본군 위안소의 역사
실제로 위안부의 역사는 정신대보다 훨씬 깁니다. 알려진 최초의 위안소는 1932년 상하이[上海]에 주둔한 일본군 기지의 주변에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재인식》에 실린 후지나가 다케시(藤永壯) 교수의 <상하이의 일본군 위안소와 조선인>이란 논문이 바로 그 상하이 위안소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논문에 따르면 일본군이 위안소를 개설한 목적은 병사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여 민간 여자를 강간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하이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인에 대한 매춘업이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에[江戶]시대부터 사기세끼[貸席]라 하여 행정당국의 허가를 받아 창녀들에게 매춘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고 요리도 팔고 하는 공창이 발달했습니다. 그 가시세끼가 벌써 1907년부터 상하이에 진출했던 것입니다. 그때 따라간 매춘녀를 가리켜 일본사람들은 가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잠시 후지나가의 논문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상하이만도 아닙니다. 1907년이면 서울에도 일본의 가시세끼와 가라유키상이 진출했다고 보입니다. 서울 용산의 일본군 주둔지 부근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유곽이 생겨났던 겁니다. 그때 주변의 공동묘지를 함부로 허물어 분쟁이 생겼는데요,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묘지 주인들의 요구에 일본인 업주는 “해당 유곽지가 경성(京城)에 주둔한 일본 군졸의 위생에 필요하여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없다”고 변명하였습니다.(《漢城府來去文》(하), 서울시사편찬위, 297쪽). ‘위생’이란 말에서 저는 당시 일본군 주변에 세워진 유곽을 사실상 위안소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출발은 상당히 이른 시기로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후지나가의 논문입니다. 어쨌든 1932년 일본군이 상하이에 위안소를 세운 것은 맨땅에다 건물을 짓고 여자들을 모으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같이 일찍부터 진출해 온 일본인의 매춘업을 군전용으로 지정하고 감독하는 체제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매춘을 목적으로 상하이로 진출한 가라유키상은 일본여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있음에 후지나가 논문의 가장 중요한 기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여자들도 1931년 이후 활발히 상하이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1931년 상하이의 조선인은 남자가 717명, 여자가 139명이었습니다. 1936년이 되면 남자는 884명으로 별로 늘지 않았는데, 여자가 913명으로 남자보다 많게 대폭 증가하였습니다. 그 상당 부분이 조선에서 건너간 매춘에 종사한 여자들이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가 되면 조선인이 경영하는 위안소도 생기고 거기에 수용된 위안부 수도 증가해 갔습니다. 그 가운데는 1937년 자본금 2천 원으로 시작한 위안소가 1940년 자본금 6만 원으로 번창한 업소도 있습니다.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의 박일석이란 사람이 경영한 ‘카페 아세아’입니다. 그렇게 이름이 알려진 조선인 업주를 논문에서 세어 보니 모두 29명이나 되는군요.
위안소는 대략 세 가지 형태였습니다. 하나는 군이 직접 경영한 것인데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민간업소를 군전용으로 지정한 것입니다. 업자는 군속의 신분이 되어 군의 세밀한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마지막은 군이 지정하지만 민간인도 이용하는 매춘숙입니다. 후지나가 교수는 아직도 건물이 남아 있는 상하이 위안소를 직접 답사하여 그 내부 구조까지 밝힙니다. 아울러 일본에 생존해 있는 위안소 업자와 인터뷰도 하면서 자료 속에 나오는 위안소들이 어느 유형에 속하는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합니다. 조선인 위안부들의 운명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기왕에 버린 몸 하면서 악착같이 깜짝 놀랄만한 돈을 번 여인도 있는가 하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아편을 하다가 거지가 되어 길거리에서 얼어 죽은 여인의 슬픈 이야기도 있군요. 이상이 후지나가 교수의 논문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상하이의 위안소는 이후 일본군이 주둔한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주둔군 사령관의 재량으로 설치되던 위안소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에 전 일본군의 범위에서 공식화합니다. 같은 해 일본군 수뇌부는 전 일본군에 병사 150명당 1명의 위안부를 충당하라는 지령을 내립니다. 병사들의 성적욕구를 해소하여 민간인 여자의 피해를 막고, 병사들의 성병을 통제하고, 또 군사기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합니다. 이후 위안소는 근 280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주둔한 모든 지역에서, 북으로는 흑룡강 소만(蘇滿) 국경지대에서부터 남으로 라바울 등 남태평양 제도에 이르기까지, 서로는 중국과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로 넘어가는 미얀마 전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예외 없이 설치되었지요. 일본은 물론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주변에도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조선에 있었던 위안소로 제가 증언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은 두 군데입니다. 한 곳은 대전시 교외의 일본군 주둔지의 부근이었습니다. 그 곳을 이용한 적이 있는 일본군 지원병 김성수는 그 곳을 병사들이 ‘P야’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P는 영어 prostitute(창녀)의 첫 글자이고 ‘야’는 일본말로 옥(屋), 곧 집을 말합니다. 언젠가 1944년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중국 난징[南京] 부근에서 전투를 하다 돌아오신 할아버지를 만났더니 그 분도 위안소를 ‘피야’라고 하더군요. 대전의 ‘피야’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김성수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일본 키모노를 입은 중키의 여성이 나오면서 일본말로 인사를 하는데, 발음으로 조선여자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리고선 위안소를 이용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욕망은 간단하게 채울 수 있었으나 허무한 감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떤 인생길을 걸어 왔으며, 앞으로 또 어떤 길을 걸어 갈 것인가. 이를 생각하니 동정을 금하지 못했다”(《상이군인 김성수의 전쟁》, 금하출판사, 69쪽).
저는 아직 이렇게나 정직하게 자신의 인생을 고백하고 있는 자서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한 곳은 진해에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에 진해 해군기지에 군속으로 동원되었던 어느 할아버지가 거기에 들렀던 자신의 체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내무반의 상급자가 호루라기를 불며 “위안소에 갈 사람은 집합하라”고 하여 얼떨결에 호기심으로 따라 나섰다고 하는군요.
위안부들의 처지
기록에 따르면 위안소의 입구에는 이용수칙을 적은 판자가 걸려있었습니다. 위안소 내에서 술을 마시지 못한다,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이용시간은 저녁 몇 시까지이다, 단 하사관과 장교는 밤 몇 시까지이다, 등등과 더불어 이용요금이 적혀 있었습니다. 병사와 장교의 차이가 있었는데 병사는 대개 1~2원이었습니다. 병사의 한 달 월급이 7~10원이었음을 고려하면 위안소 이용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던 셈입니다. 이용 시에는 반드시 콘돔을 사용해야 했는데, 당시는 이를 삿쿠라고 하였습니다. 삿쿠는 한 달에 한 개씩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는데, 대개 위안소에 두었다가 병사들에게 직접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위안부는 1주일에 한 번씩 위생 검진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업자는 위안부의 명단과 변동 상황을 매번 군부대에 보고해야 했습니다. 수입금은 대개 위안부와 업자 간에 절반씩 분배하였습니다만, 업자에게 받은 선대금이 과중하거나 악덕 업주를 만날 경우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위안부들은 지정된 장소를 이탈할 수 없었습니다. 기록에 따라서는 제법 자유롭게 시가를 돌아다녔던 여자들도 있습니다만, 대개는 행동의 자유가 박탈된 노예와 같은 처지였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위안부 연구자들은 위안부를 성노예(性奴隸)라고 규정하고 있는데요,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안부들의 경제적 처지는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앞서 상하이 위안소에서 깜짝 놀랄만한 큰돈을 벌은 위안부의 이야기가 잠깐 나왔습니다만, 여러 기록을 보면 아주 드문 일도 아니었습니다. 중국 한커우[漢口]에는 일본여자 130명과 조선여자 150명이 수용 된 규모가 큰 위안소가 있었는데, 이름이 경자라는 조선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3만 원을 저축하였는데, 5만 원이 되면 서울로 돌아가 작은 요릿집을 세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령관이 대단한 여자라고 표창을 하라고 했답니다. 1942~1945년간 미얀마 전선에서 머물다가 돌아 온 문옥주라는 위안부가 있는데, 자신의 기구한 역사를 책으로 남겼습니다. 그녀는 5천 원의 거금을 고향집에 송금하고도 2만 5천 원이 든 군사우편 저금통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2년 당시 남의 집에 식모살이를 하면 대개 한 달에 11원을 받았습니다. 이에 견주면 경자나 옥주가 얼마나 큰돈을 모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지요. 남태평양 라바울 섬의 어느 조선 위안부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군에게 200원을 맡기면서 고향집으로 송금을 부탁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야마나시[山梨] 현에 있는 자기 집값보다 많구나 라고 생각했답니다. 저는 이 기사를 대하면서 밤마다 남태평양의 십자성을 바라보며 고향집을 그리워하고 가족의 생계를 걱정했던 한 조선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위안부의 계약기간은 보통 2년이었습니다. 기간이 지나서 모은 돈을 가지고 돌아온 여자들도 있었습니다만, 상당수의 위안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악덕업주에 걸려 돈을 구경하지 못한 불쌍한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동남아나 남태평양으로 간 여인들 가운데는 전쟁말기에 배편이 끊어져 돌아올 수 없었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휴지조각으로 변한 군표를 가방 한가득 들고 있었던 여인들도 있었으며, 강을 건너다 그만 군표가 든 가방을 떠내려 보낸 어느 여인의 애달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은 어떻게 해서 저 만주로, 중국으로, 동남아로, 남태평양으로 보내진 것일까요. 이 문제가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분노해 마지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요. 이제부터 그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녀들은 어떻게 끌려갔던가?
전장에서 언급한 대로 1938년 소설《농군》의 작가 이태준은 만주를 여행합니다. 펑티엔[奉天]역 이등대합실에서 그는 다섯 명의 조선 여자를 만납니다. 한 여자는 얼굴이 까무잡잡한데 30이 훨씬 넘어 보이고, 다른 한 여자는 솜털이 까시시한 16살의 소녀이고, 다른 셋은 22~23세로서 핏기는 없으나 유들유들하고 건강해 보이는 여자들입니다. 다들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노랑수염의 노신사가 서 있습니다. 이태준이 여자들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자 노신사가 다가와 시비조로 무엇 때문에 묻느냐고 하면서 베이징[北京] 근방으로 간다고 대답합니다. 여인들은 노신사를 아버지로 부릅니다. 이태준은 그 노신사를 베이징이나 티앤진[天津]의 여관이나 요릿집의 주인쯤으로 짐작하고 “험한 타국에 끌려가는 젊은 계집들”에 새삼스레 ‘골육감’을 느꼈다고 그의 여행기에 적었습니다(《무서록》, 서음출판사). ‘골육감’이란 말이 조금 낯섭니다만, 동포로서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겠지요.
다음에는 1941년에 나온 최명익의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소설입니다. 어느 열차의 혼잡한 3등 칸에서의 이야기입니다. 한 신사가 젊은 여인을 데리고 갑니다. 사람들은 신사와 여인의 관계를 궁금해 합니다. 신사가 화장실에 간 사이 어느 사람이 “만주나 북지로 다녀 보면 돈벌이는 색시장사가 제일인가 봐”라고 하여 여자가 끌려가는 색시임을 맞춥니다. 화장실에 다녀온 신사는 일선으로 다니면서 색사장사한 자기의 경력을 털어 놓습니다. 역시 돈벌이는 그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여인을 이삼십 명씩 거느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느냐고도 합니다. 데리고 가는 색시는 도망쳤다가 잡혀가는 중이었습니다. 어느 역에 도착하자 신사는 내리고 그 아들이 탑니다. 아들은 다짜고짜 여인의 뺨을 후려칩니다. 도망에 대한 화풀이지요. 여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화장실로 갑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소설 속의 나는 그 여인이 자살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여인이 화장실에 간 것은 화장을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리에 돌아온 여인은 아들에게 함께 도망친 다른 여인의 소식을 묻습니다.
이렇게 그 시대는 도처에서 여인을 끌고 가는 색시장사의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그 모습은 결코 낯설거나 어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여인의 뺨을 쳤지요. 그래도 아무도 그에 대해 뭐라 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앞서 저는 조선의 여인들이 어떻게 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보내졌는가를 물었습니다만, 저의 한 가지 대답은 색시장사입니다. 색시장사가 그녀들을 만주로, 중국으로, 동남아로, 남태평양으로 보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점은 그 시대의 상식이기도 했습니다. 생존 위안부 175명도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증언하였지요. 그에 따르면 175명 가운데 62명이 ‘협박 및 폭력’에 의해, 82명이 ‘취업사기’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습니다(정진성,《일본군 성노예제》, 66쪽). ‘협박 및 폭력’과 ‘취업사기’가 어떻게 다른지 관련 책을 유심히 보아도 자세한 설명이 없군요. 제가 보기에 이 둘은 구분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취업사기가 들통이 난 그 순간부터 색시장수는 폭력배로 돌변하지요. 그들은 딸을 가진 가난한 집에 접근하여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자리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부모를 유혹하여 딸을 데리고 갑니다. 경우에 따라선 거액의 선대금을 지불하지요. 그런 경우엔 사실상 딸을 팔아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장삼이사》에 의하면 1941년 색시들의 몸값은 1천 원의 거액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이 남긴 증언은 다양합니다. 상하이 위안소에 갔다가 어느 일본군 장교의 도움으로 몸을 건진 김씨 할머니는 1937년 17살 때 돈벌 수 있다는 모집인의 말에 속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을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어느 할머니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부모를 위해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위안부가 되는 줄 알고도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색시장수들은 군위문단을 사칭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7월 함경도 청진의 어느 소녀가 위안소로 끌려간 것은 관동군 위문단의 모집에 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자 군속의 모집도 유력한 경로의 하나였습니다. 군에서 간호부로 일한다거나 밥 짓고 빨래하는 여자를 구한다고 해놓고선 위안부로 끌고 간 경우가 되겠습니다. 1940년 일본군이 남중국 난닝[南寧]이란 곳을 점령한 다음 위안소를 개설하였습니다. 그곳으로 황씨 성을 가진 조선 남자가 수십 명의 여자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황씨는 지주의 아들이고 데리고 간 여자들은 모두 소작농의 딸이었지요. 황씨는 당초 육군 직할의 다방과 식당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위안소를 경영하면서 그 남자는 여자들에게 매춘을 강요했습니다.
1944년 한커우에서 위안소를 경영한 안씨 성의 조선 남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친구가 하던 것을 인수했다고 합니다. 위안소 경영의 가장 큰 애로는 계약기간이 끝나 돌아간 여자의 뒤를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고향에 돌아간 친구가 여자들을 계속 대주어 큰 문제가 없는데, 다른 업자들은 1년에 한두 번씩 직접 고향에 가서 여자들을 구해 오는 것이 여간 큰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군령(軍令)을 사칭하는 등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여자 군속의 모집이라고 속인다는 뜻이겠지요. 떳떳하게 신문광고를 내는 모집책도 있었습니다. 현재 알려진 신문광고로는 경성일보에 2건과 매일신보에 2건이 있습니다. 경성일보 1944년 7월 26일자 광고를 보면 “위안부 지급 대모집”이란 타이틀을 달고 “연령은 17~23세, 근무지는 후방 ○○대 위안부, 월수는 300원 이상, 전차금 3000원 가능”이라 하였군요.
“위안부=성노예 주장은 ‘환상’...선진국 되려면 합리적 사고해야”
http://www.mediawatch.kr/mobile/article.html?no=250552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