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 434-476쪽에는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의 소정희 교수의 귀한 논문이 실려 있다. 아래에 요지를 소개한다.
식민통치의 마지막 10년(1935-45)은 조선의 산업혁명 시기였다.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추방되고, 노동계급이 태동하고, 인구의 유동성이 증대하고, 도시 사회가 폭넓게 확산되고, 여성계에서는 소위 신여성에 대한 선망이 확산됐던 그런 시기였다. 1917년 이광수의 소설 '무정'이 연재되었다. 이 소설은 신문명의 보급서였다. 서구의 신문명이 유입되고, 개화사상이 확산되고, 신청년과 신여성을 연애의 표상으로 삼은 신소설이었다. 1935년 심훈의 상록수는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농촌을 계몽하기 위한 계몽서였다. 당시의 농촌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고루하고 원시적이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위안부 역시 이러한 개화기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190명의 위안부를 조사했더니 88%에 해당하는 168명이 바로 탈농촌 시기인 1937-44년 사이에 위안부가 되었다. 도시를 흠모하는 일종의 골드러시가 한창이었던 시절에 가정을 뛰쳐나온 여식들이 인신매매단의 좋은 먹이감이 된 것이다. 181명의 위안부를 조사한 결과 그중 4분의 1 이상이 이미 가족과 떨어져 식모, 공장노동자, 식당 및 기생집 접대부 등으로 일하고 있다가 위안부가 되었고, 66% 정도가 만주, 대만, 중국 등으로 이송되어 갔다.
위안부로 가게 된 경우는 가정을 이미 탈출해 있던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에서 부모나 오빠들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있던 어린 여식들이 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곧장 인신매매단의 덫에 걸려들기도 했고, 배움의 신기루를 찾아 넓어진 세상으로 도망쳐 나온다는 것이 곧 인신매매단의 희생양이 되어 위안부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당시 인신매매단의 앞잡이는 대부분 조선인들이었고, 군대 위안부를 경영하는 사람들 속에는 조선인들도 꽤 있었다.
위안부로 가는 길은 두 가지 경로였다. 가정-노동시장-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고, 곧바로 가정-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촉진한 매개체가 인신매매단이었으며, 인신매매단에 걸려들 수 있었던 환경은 곧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과 학대 그리고 배움에 대한 선망을 무조건 억압하는 무지몽매한 조선 가정의 여성비하 문화 때문이었다. 소정희 교수는 가정에서 곧바로 위안부라는 구덩이로 떨어진 한 많은 위안부 6명의 케이스를 정대협 자료에서 쉽게 찾아냈다. 이러함에도 정대협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위안부 문제를 정치문제로 부각시키기 위해 사회에 그릇된 인식을 확산시켰다.
정신대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위안부는 가정에 있던 조신한 여식들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쳐 강제로 붙잡아다가 일본군이 운영하는 유곽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소정희 교수에 의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소정희 교수가 조사한 6명의 위안부 사례는 이를 이해하는데 생생한 자료가 된다. 이하 소정희 교수의 사례를 요약 소개한다.
조선의 부모가 딸들을 위안부로 내몬 대표적 사례
1) 문필기: 정대협이 매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주최하는 시위에 늘 참가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18세가 되던 해인 1943년 후반부터 2년 동안 만주의 군위안소에서 일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평양-개성-서울을 거쳐 고향으로 갔지만, 이내 고향을 떠나 진주-목포-광주-전주를 떠돌며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1925년, 경남 진양군에서 2남 9녀를 둔 구멍가게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공부였다. 아버지는 “가시내가 공부하면 여우 밖에 될게 없다”며 화를 냈다. 어머니가 몰래 쌀 한 말을 팔아 보통학교에 넣어주었다.
일주일 안 돼서 아버지가 딸을 교실에서 끌어내고 책을 불태워 버렸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딸을 죽어라 패고 집에서 쫓아내 버렸다. 큰 집에 가 있다가 다시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된 상태에서 9살부터 집에서 살림하고, 밭일도 하고, 목화밭을 매고, 물레질도 했다. 구멍가게에서 파는 고구마도 쪘다. 농사일을 할 때마다 밥을 해서 들로 날랐다. 그러던 1943년 가을 어느 날, 마을에 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는 50대 아저씨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 해서 따라나섰다. 18세였다. 그 남자와 일본인 순사가 그녀를 곧장 차에 태워 부산으로 데려갔다. 긴 머리를 자르고 치마저고리를 벗기고 원피스를 입혔다. 그리고 다른 네 명의 여인들과 함께 곧장 만주로 이송됐다. 이 이야기를 포함해 아래의 모든 이야기들은 정대협이 엮은 ‘증언집’에 수록돼 있다.
이 여인이 매주 수요일 12시에 일본 대사관 앞에 나와, 일본이 자기를 강제로 연행해 가서 위안부로 삼았다며 사죄와 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안부 놀음은 간첩의 처이자 정대협의 상임대표인 윤미향이 꾸려가고 있다. 문제는 이 여인에 있는 게 아니라 정대협에 있다.
2) 이상옥: 이 위안부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달성면 면장이었다.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짓는 부농이기도 했다. 9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오빠가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서 어디다 쓰느냐”며 학교를 못 가게 하고, 책을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 그래도 학교에 가려 하자 죽인다고 협박했다. 옆집 언니가 학교에 다니는 게 너무 부러운 나머지 그해 어머니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로 도망갔다.
고모가 학교를 보내주었지만 오빠가 고모에게 집요한 압력을 넣었다. 고모집을 나와 소리개라는 집에 들어갔다. 9명의 처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그들의 아버지에 의해 팔려왔다고 했다. 15세인 그녀가 가장 어렸다. 이 여인들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니, 시모노세끼였다. 그들을 인솔한 군속이 열 명의 처녀들을 넘긴 곳은 바로 조선인 부부가 운영하는 군 유곽이었다. 그들은 이들 처녀들과는 아무 관계없이 돈을 주고받았다. 이 여인은 일본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일본 군병원에 일하면서 봉급도 받았다. 일본 군의관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조선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날 폭격을 맞아 허사가 됐다. 이 여인 역시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으로 인해 유곽으로 떠밀린 케이스였다.
3) 이득남: 이 위안부는 1918년생이다. 그녀는 1939년부터 3년은 중국에서, 또 다른 3년은 수마트라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주정꾼이자 노름꾼으로 이유 없이 마구 때렸다. “집에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17세에 시집을 가라 했지만 그녀는 이를 팔려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웃 친구와 함께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을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인천 방직공장으로 갔다. 그게 위안부로 가는 길이었다.
4) 김옥실: 이 위안부는 1926년 평양시내에서 10리 되는 촌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김은례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공부하려는 딸에게 가혹한 매질을 했다. 11세 때, 동네친구 하나가 한글도 가르쳐주고 노래도 배워준다는 데가 있다 해서 같이 가서 며칠 있다가 아버지에 들통이 났다.
“에미나이세끼가 글 배워서 어디에 쓰갔네, 연애편지질이나 하려구 그러나!” 매를 든 아버지가 무서워 할머니 뒤에 숨었지만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린다며 때렸다. 그 후 아머지가 보기 싫어 집을 나왔다. 하루는 아주머니들로부터 평양에서는 기생이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고운 옷 입고, 고운 가마 타고 다닌다는 기생이 되고 싶어 기생집으로 가서 양녀가 됐다. 불과 일주일 만에 아버지에 들켰다. “이 에미나이가 조상 망신, 동네 망신은 다 시키고 돌아다닌다”며 매를 맞고 집으로 압송돼 왔다. 다시 양말공장으로 뛰쳐 나갔다. 거기에서 3년, 담배공장에서 4년 일하다가 드디어 인신매매 단에 걸려들었다.
5) 배족간: 이 위안부는 1922년생이다. 이 여인은 자살까지도 기도했을 정도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광목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거짓말에 속아 집을 나간 것이 곧 중국행이 되었다. 중국의 여러 위안소들을 떠돌았다. 1946년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냉담했다. 어머니가 임종할 때 딸을 찾았지만 그녀는 가지 않았다.
6) 송신도: 이 위안부는 1922년 생으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16세 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수많은 잡직들을 전전하다가 좋은 직장 구해주겠다는 이웃의 꼬임에 빠져 중국으로 갔다가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일본인 병사가 결혼하자고 하여 일본으로 동행했지만, 그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버렸다.
정치목적을 위해 위안부 악용하는 정대협
이 6개의 사례들은 극히 일부의 것에 지나지 않지만 당시의 조선의 사회상을 잘 비추어준다. 이들을 비극적인 나락으로 내 몬 것은 일본 순사가 아니라 그녀들을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빠들이었다, 당시 사회는 개화의 바람을 타고 있었다. 어린 처녀들은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과 가정에서의 폭력 사이에서 탈출을 선택했고, 그 탈출은 곧장 인신매매단으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이런 사정들을 놓고, “당시 조선 여인들은 모두 가정에 있었으며, 일본순사들이 가정으로 쳐들어 와서 처녀들을 강제로 끌어갔다. 사과를 하고 보상을 하라” 이렇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심미자의 경우처럼 일본 순사가 교실 등에서 강제로 끌어간 경우들도 있다. 하지만 심미자 할머니의 증언이나 위 사회상을 보면 대부분의 위안부는 가정폭력과 무지로부터 탈출했다가 인신매매단에 걸려든 여식들이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위 6개의 케이스는 모두 정대협이 작성한 증언록에 있는 내용들이다. 모든 사정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대협은 위안부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거리에 내돌린다. 문필기는 매주 수요일마다 대사관 앞에서 "내 청춘을 보상하라"고 시위를 하지만 정대협이 엮은 '증언록'에 의하면 그녀는 일본에 요구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 2부는 ‘식민지 하의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일본의 오사카산업대학 후지나가다케시 교수, 미 시카고대학 최경희 교수,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의 소정희교수의 글이 방대한 분량의 논문으로 실려 있다.
이 세 편의 논문을 보면 우리 정대협의 주장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들인가를 낱낱이알 수 있다. 아울러 논문이 인용한 근거자료들을 보면 일본인들의 조사가 매우 많은 반면 한국인들의 조사가 매우 빈약하다. 국내학자들은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고, 정대협은 객관성이 결여된 감정적 주장을 해왔다. 때문에 이 분야를 연구하는 수많은 국제 학자들에게 망신스러운 결과만 초래했다는 것이 이들 자료에 시사돼 있다. 먼저 후지나가 다케시 교수의 글 “상하이의 일본군 위안소와 조선인‘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군 위안소의 원조, 상해위안소
1. 오키나와에 거주한 조선인 전 위안부의 증언을 기록한 르포르타주 등 십여 권의 책들이 일본에서 발행됐다. 위안부 문제가 일본에 충격을 준 것은 1991년 8월부터 위안부들이 잇따라 자기 존재를 밝히기 시작했고, 이어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한 소송들을 전개한 데서 태동했다. 자료상 확인된 바에 의하면 1932년 상해 위안소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며 중일전쟁 개시 이후 이 지역에서의 위안부 수가 최대 규모였기 때문에 상해 위안소는 타 지역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해 위안소 환경을 연구하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상해에는 개인적인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 매춘여성(가라유키상)이 해외로 나간 가장 전형적인 케이스다.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은 1880년대부터 가라유키상에 대한 단속에 나섰다. 이는 공창제도의 도입을 의미했다. 공창제도의 설치 동기는 1)강간방지, 2)군의 사기앙양 3)성병 예방 4)방첩이었다.
당시 상해에서의 조선인 여성 실태는 이러했다. 상해에서 조선인 여성 댄서가 출현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여급도 출현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사창도 있었다. 이들은 신흥접객부로 어쩔 수 없이 매춘을 했다. 이러한 여성들은 불경기로 인해 점점 더 많이 상해로 모여들었다. 1936년 당시 상해에는 조선인 여성 댄서가 37명, 이들은 풍속을 혼란시켰다는 비난도 받았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음식점, 카페 등에서 일하는 조선인 여급은 48명,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밀매음을 하여 주인과 반반씩 나누었다. 이 무렵 상해에는 290명의 조선인 사창도 존재했다. 사창이란 공창으로 인정받지 못한 곳이었다.
만주사변(1931년 9월) 때 나타난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매춘부 출신이며 그 중에는 조선인 여성이 일부 포함돼 있었지만 중일전쟁 중기인 1940년 무렵에는 조선일 여인을 강제로 데려다 위안부를 시킨 ‘성적 노예’들도 새롭게 출현했다. 중일전쟁이 전면화 된 이후 위안소가 대량으로 개설되는 시기에 위안소 경영자 중에 조선인 이름이 꽤 있었다.
일본군이 개설했던 위안부는 1)군직영위안소 2)군이 감독-통제하는 군전용 위안소 3)민간매춘소를 병사용으로 지정한 곳(민간, 군 공용) 4) 순수한 민간 전용 위안소(군이 다니더라도 그건 개인적인 일). 4번째 형 위안소는 일본군 위안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1932년3,14자 상해 파견군 고급참모 오카베 나오자부로의 일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요즘 병사들이 여자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다는 추잡한 이야기를 듣는 일이 많다. 이는 피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설을 만드는 것이 좋다고 판단. . .”
상해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는 이렇게 회상했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한다. . .이렇게 말하는 나는 부끄럽지만 위안부 안의 창설자다. 쇼와7년(1932)의 상하이 사변 때 두 세 건의 강간죄가 발생했으므로 파견군 참모부장이었던 나는 그곳 해군을 본떠 나가시키 현지사에게 요청하여 위안부단을 불러들였다. 그 후 강간죄가 완전히 그쳤기 때문에 기뻤다”
1932년 당시 상해의 일본인의 풍속영업 현황은 다음과 같다. 요릿집 3개소, 음식점 72, 다방 13, 해군위안소 17, 구락부 2, 무도장 1, 예기 134, 무도녀 170, 작부 166.
상해 주재 일본인의 매춘 역사
“메이지 원년(1868년)부터 메이지 14-15년(1881-1882) 무렵까지 상해 주재 일본인 수는 10-100명이 고작이었으며 1년에 평균 5-6명씩 증가했다. 대개 남자 3분1, 여자 3분의 2였다. 여성의 6-7할은 외국인을 상대로 매춘을 했다. 이들이 일본 매춘의 선구자일지 모른다. 모리사키 가즈에저서 ‘가라유키상“은 메이지 15(1882)에 상해에 800명의 매춘부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일본 아가씨들이 금새 늘어난 상해에서는 영사관이 이를 국가의 수치로 간주하고 붙잡아 500-600명을 본국으로 송환했다. 그래도 여전히 200명 정도는 숨어 있었다”
결 론
매춘의 역사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다 어두운 역사로 연속돼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1961년 5.16 혁명 이전까지 매춘은 불법으로 통제됐었다. 그래서 매춘은 은밀히 가정으로 스며들었고, 성폭행과 살인 등의 나쁜 형태로 확산돼 갔다. 이에 박정희의 최고회의는 공창제를 채택했다. 가정으로 파고들던 성범죄와 성병 등이 매우 효과적으로 개선됐다. 위 논물 일부를 보면 당시 일본도 도덕과 품위와 성적 수요를 놓고 많은 생각들을 했던 것으로 짐작되며 당시 그들의 고민도 지금 현재에도 우리가 풀지 못한 채 끌어안고 있는 고민과 일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자. 한국사회는 아마도 세계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성적 풍기문란 공화국이다. 국가를 이끌고 나가는 자리들은 있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무능과 이기심으로 서로 물어뜯는 일로 1년 365일을 보내고 있다. 이런 식으로 몇 년을 더 낭비하면 우리는 북한에 먹히고 말 것이다. 만일 지금 북한에 먹히면 우리의 여성 국민들은 70여 년 전에 일본인들로부터 당한 고통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비참한 취급을 받다가 생명마저 잃게 될 것이다.
옛날의 선조들이 못나서 강대국에 먹힌 것은 사실이다. 만일 일본에 먹히지 않고 중국이나 러시아에 먹혔다면 러시아의 위안부 처지나 중국의 위안부 처지는 일본의 위안부 처지보다 더 양호했을까? 나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원망하기보다는 못난 짓을 하다가 나라를 빼앗겼던 우리 선조를 원망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소정희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위안부는 무지몽매한 한국의 아버지와 오빠들의 학대가 낳은 산물이었다 할 것이다. 이런 성격의 문제를 가지고 침소봉대하고 왜곡하여 위안부 문제를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를 깨기 위해 악용되고 있는 것은 하루라도 빨리 정지돼야 한다. 더구나 정대협 지휘부는 북한과 간첩에 깊이 연루돼 있는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지 아니한가. 당장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이는 수요집회부터 중단시켜야 할 것이다. 창피해 못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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